출처 ☞ http://www.gesomoon.com/zboard/zboard.php?id=ECT&page=1&sn1=&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0002

중국최대 포털 바이두(百度)에 네이버 지식검색과 유사한 "앎(知道)" 서비스가 있음.  거기서 퍼왔는데, 적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며 중국 정부, 학계의 공식 입장을 반영하는 자료로 생각되어 함 번역해 봄.

단, 염통이 약한 횽아들은 중국에서 "기원"하였다는 우황청심환 드시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함.

출처:
http://zhidao.baidu.com/question/73080388.html?si=4&wtp=wk [새창에서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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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고구려와 한민족

고구려는 부여 민족의 한 갈래인 것 같은데, 왜 한국인은 자기가 고구려인이라고 말하기를 매우 좋아하나요?

가장 선호된 답안:

과거의 매우 긴 기간 동안, 중국학술계가 고구려 옛 왕국의 역사에 대하여 전면계통적 연구가 결핍되었던 관계로, 고구려와 삼한사람 왕건이 서기 918년에 한반도에 건립한 고려왕조 간에 혼동이 일어났다.  그런고로, 고구려는 적지 않은 중국학자로부터 한국 고대 국가라고 오인되고 말았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중국학자의 고구려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중국사학계는 이러한 엄중한 역사판단의 오해를 의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착오를 바로잡고자, 현재 중국사학계는 이미 많은 양의 고구려 관련 역사 저서를 출판하였다. 예컨대 刘子敏 선생의 "고구려역사연구", 耿铁华 선생의 "중국고구려사", 马大正 등 선생의 "고대중국고구려역사총론", "중국고구려역사속론", 杨军 선생의 "고구려 민족 및 국가의 형성과 변천" 등등.  

중국사학계에서는 이미, "고구려는 중국 동북 고대 민족이 건립한 왕국이고, 현재 한반도상에 위치한 왕씨고려(서기 918 건립)와는, 명칭을 제외하면 별개의 것이다.  주체, 민족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중대하게 구별되는 국가이다"라는 역사관점을 공식화하였다. 단, 한국의 학자는 이에 대하여 반대한다.  한국역사학자는 대개 고구려가 본국 역사에 속할 뿐 중국과는 무관하다고 여기며, 고구려인이 자기들에게 속하는 독특한 문명을 창립하였고, 일찍이 고대 중국과 맞먹는 대제국을 건립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대표저작은 서병국이 지은 "고구려제국사"와 신형식이 지은 "고구려사"가 있다.

한국학자가 중국어로 쓰여진 고대사료를 완전히 해독하는 것은 일정한 어려움이 있는 관계로, 중한이 고구려역사연구상 교류하는 것에는 일정한 어려움이 있다. 또한 조선과 한국 역사학자들의 주요 문제는 사료가 자기들의 용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임의로 곡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사서 중 고구려의 "독립성"의 역사소재로 밝힐 수 있는 것에 관하여는 크게 덧붙여 뚜렷이 드러내면서, 고구려가 중원과 정치, 문화, 경제상 연계되어 있었음을 설명하는 사료에 대하여는 애써 소홀히 한다.

한반도의 역사학자 중, 이러한 현상은 독립된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라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중국학자는 고구려 역사연구 중에 존재하는 바의 주요 문제를 살핌에 있어 "상아탑주의"를 견지한다.  작은 그룹 내에서 취득한 성과에 만족하여, 학계가 이미 가지고 있는 최신의 고구려역사연구 성과를 대중에게 전시하는 것을 주동하려는 동력과 의지가 없다.  이로써 매우 많은 불합리한 고구려 역사 관련 인식이 만들어졌으며, 더욱 큰 범위 내에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을 정정 작업이 이뤄지지 못했고, 보편민중의 역사인식에 착오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한의 고구려역사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여하한 일방이 굴복하여 남을 따르기를 요구해서는 안되고, 진리가 변명을 이겨낸다는 관점에 터잡아 교류를 강화하여야 하며,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학술상 차이의 해결을 쟁취하여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오로지 학술교류를 통해서만이 가능할 뿐, 기타의 수단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고구려 역사의 고찰은 한반도 국가와 민족의 형성 시점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중국의 학자들은 대개 한반도의 가장 최초의 국가가 기원전 11세기에 형성된 기씨조선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한국, 조선의 학자는 대개 한반도 최초의 것은 기원전 31~24세기에 형성된 단군조선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선학자들은 "단군릉"에서 출토된 인골에 근거하여 시점을 기원전 3018년까지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다.

실제로는, 신화 중의 "단군"은 역사를 "믿는" 역사연구방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허망성의 산물로 여겨지며, 조선과 한국의 사학자의 주장은 성립이 어려운 것들이다.  구체적인 원인은 우리가 "단군"이라는 표제어에 대한 해석 중에서 상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중국의 대부분의 학자는 모두 기씨조선과 위씨조선이 한반도상 최초 형성된 국가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양 고대국가는 중화에 속하는 고대 봉국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어떤 중국학자는 최근 출판된 "동북사"라는 책 중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이전에 일찍이 한반도에 존재한 기씨조선, 위씨조선, 진국은 모두 진정한 의미의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읍락연맹체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반도상의 백제, 신라 및 그 영토에 근접한 고구려가 그 일대 지역에서 최초 형성된 국가라는 것이다 (모두 AD 2, 3세기 전후).

고구려는 정권건립후 매우 일찍 왕이 있었으나, 그 왕은, 초기에 수시로 파면당하고 심지어 살해당했던 부여인의 왕과 유사했고, 국가의 군주가 아니었다.  "삼국지"의 기재에 따르면 서한시대의 고구려는 한의 현토군 고구려현에 예속된 일개 부족이었고, “高句麗令主其名籍”이었으며(역주: 옛날 기록이라서 잘 번역이 안되삼. 위지 동이전 일부를 따온 것이니 역사연구자 분 도와주삼) ("삼국지" 권30 "고구려전"), 현토군을 따라 중국지방관으로써 응당 가져야 할 품급에 따른 관복을 받았고, 고구려 정권의 고관은 "주부"라 불리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현급관원의 칭호이고, 이 역시 고구려정권이 중국지방정권으로서 존재하였고, 중국 한조의 동북지구의 기층 행정조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영성(靈星)"에 제사지냈는데, 이는 서한정부의 "군국현은 영성사를 짓는다"("사기, 봉선서")라는 규정을 집행한 것에 연유하는 것이며, 충분히 그 기층조직으로서의 성질을 체현하는 것이다.  당시에, 고구려는 진정한 국가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진 이후, 중원의 전란을 기회 삼아, 고구려의 세력은 신속히 발전하였다.  일개 정권으로서 중원정권과 사이에 발생한 최초의 대규모 충돌은 삼국시대의 관구검의 역(役; 역주 - 뜻이 애매한 단어라 그냥 둠)이었다.  이 시기의 고구려는 이미 국가형태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로써 고구려의 국가적 형성은 동한말기의 일이 틀림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약 AD 2, 3세기 사이로 생각됨).

덧붙여, 최초의 고구려 국가의 통치 중심은 오늘날 중국 길림성 집안 및 요녕성 환인 일대에 있었으며, 한반도와 관계가 크지 않다.  고구려는 한 현토군 고구려현 통치하의 부족에서 국가로 전이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은 한반도로 진입하였다.  대략 모두 BC 2세기 경의 일이다 (한반도상 정식형성 국가 또한 BC 2세기까지 이르진 않는다. 상세한 내용은 본문 후 덧붙인 "중국과 한반도의 초기관계" 참조).  단 고구려가 전국가 형태에서 국가로 전이되는 과정이 BC 3세기에 이미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점을 긍정할 수는 있다.

고구려는 이 시점을 전후하여 조위(曹魏; 역주 - 후한 말 공손씨 세력을 몰아내고 유주에서 군림하던 자) 및 전연의 연속 타격을 받아, 서쪽으로의 발전이 저해되었고, 이 때문에 한반도 북부를 향한 팽창으로 전환하였으며, 중원왕조가 설립한 군현을 점점 대체하였다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하고 낙랑, 진번, 임둔, 현토 등 4군을 설립한 이후, 한반도 북부 대동강 유역은 중국이 설립한 군현의 통치구가 되었다).

427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 고구려는 오랜 기간 백제, 신라와 영토를 다투었다.  통치층이 비교적 정확한 전략을 가졌기에(고구려 발전 후기에, 그 통치중심이 한반도에 진입한 후, 고구려는 중원왕조에 대한 조공관계를  줄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였다.  이로써 실력을 반도에 있던 적들을 타격하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점차 강성해졌고, 중원왕조가 동북 및 반도상에 가지고 있던 군현통치구를 잠식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서쪽으로는 지금의 중국 길림, 요령 2개성의 동부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한반도 대동강 유역 이남의 구역에 이르는 강국이 되었다.

일본 학자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의 통계에 의하면, AD 32년부터 666년 중, 고구려가 중원 역대왕조에 조공한 총계는 205번이다.  그 중, 32~423년의 391년 간에는, 조공이 단지 17번 있었고, 평균 23년만에 1회 발생하였다.  423~666년은 조공이 188회 있었고, 1.3년마다 1회씩 있었다. (역주: 원저 주석 생략)

고구려 내부의 정치조직이 국가를 향해 진화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국가로 들어서는 초기에, 그 성질은 여전히 중국의 지방행정조직이었다.  남북조로부터 수당에 이르기까지, 중국역대왕조의 고구려에 대한 봉호칭은 항상 지방행정기구 장관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점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일찍이 AD 4세기 중엽에, 전연은 이미 고구려왕을 영주자사로 봉하였다.  이 이후부터, 역대 고구려왕은 도독영주제군사, 도독영평이주제군사, 도독요해제군사 등 행정관할권의 관직을 승계하였다.  435년 이후, 역대 고구려왕은 늘 영호동이중랑장, 영호동이교위의 직함을 갖고 있었는데, 중원조정이 그로 하여금 중앙정부 관할 동북의 각 소수민족의 권력을 대표하도록 수여하였음을 알려준다.  이 모든 것은, 고구려 정권이 중국 중앙왕조의 지방행정조직의 특성으로서, 이 때의 고구려는 절대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가 아니었음을 명확히 반영하는 것이다.

고구려 국가의 발전과 성숙에 따라,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으로서 독립성 또한 점점 강해졌으며, 중앙왕조의 고구려 정권에 대한 태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6세기 말로부터, 중앙은 이미 고구려왕에게 지방행정관할권의 관직을 다시는 수여하지 않았고,  대장군으로 고쳐 수여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역주 - 삼사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국가 대사를 관장하는 최고 관직이었음)로, 종주국 등의 산관(散官)과 훈관(勛官)으로 봉했는데, 이는 중국 중앙왕조가 그 지방정권으로서의 고구려의 독립경향에 대하여 십분 불만이 있어 그 관할의 동부각지의 권력을 수여하지 않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그러한 종류의 모순은 부단히 커져만 갔고, 최종적으로는 수당과 고구려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수당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중국 중앙정부가 독립을 시도하던 지방정권을 토벌한 것이고, 고대중국이 국가통일 및 영토의 완전한 정비를 위하여 싸운 것이지, 나라 대 나라 간의 침략전쟁이 아니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신라 및 고구려 사이의 장기 혼전이 있었고, 상호간의 강역의 신축 변화가 비교적 많았다.  당왕조는 이를 전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백제의 고지에 웅진 등 5도독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의 고지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으며, 신라왕을 계림주도독으로 칭하였고, 이 시기 중국은 한반도를 단단히 속박시키는 통치체계를 최종적으로 확립하였다.

기타 회답: 총 4건

1. 고구려는 조선역사상 가장 휘황한 것으로 보이는데?

2. 고구려는 중국동북의 옛 종족인 고구려족이 건립한 국가야. 중국 동한왕조의 군현 내에서 건립되었어. 당조 때, 신라와 당조는 군을 합쳐 먼저 백제를 멸하고 이어 고구려를 멸했으며, 신라는 조선반도를 통일하여 당조의 부속국이 되었고, 고려왕조가 신라왕조를 교체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수백년 이후의 일이었어.  그래서 고구려와 고려는 결코 여하한의 계승관계가 없어.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자가 전자와 관계 있는 것처럼 올라서고, 찬탈자의 입장에서 검상첨금(臉上貼金; 자화자찬함)하고 자명불범(自命不凡; 평범한 자가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김)한 것 뿐이지(고구려는 비교적 호전적인 국가였음).

현재 한국은 어쨌거나 자기와 고구려를 관계 있는 양 끌어당기려 하고 있어. 이는 당대의 고려왕조가 마찬가지로 스스로 첨금(貼金; 위 "검상첨금" 참조)하려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아.  고구려는 일찍이 당조에 의하여 철저히 멸망당했고, 당조는 고구려의 대부분 인구를 당조의 각지로 유배하여 강제로 이주시켰으며,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라로 도주하여 신라인과 동화되었어. 나는 또한 고대의 고구려, 신라, 백제는 혈연관계가 있는 3개의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해.  이는 즉 우리나라의 고대의 거란인과 여진인이 조금 관계는 있으나 혼동되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야.  근대 조선민족(한민족)의 전신은 신라왕조시대에 신라인이 백제인 및 극소수의 고구려인과 융합하여 형성한 새로운 민족이며, 이들이 고려왕조와 조선왕조를 거쳐 현재의 조선민족을 형성한 것이야.  혈연상 현재의 한국인과 고구려의 관계는 크지 않아.  정신상 계승이 놀랄만한 뿐이지.

현대 역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지역별 역사에 근거하면, 고구려 역사는 당연히 중국, 조선, 한국이 공유하는 역사인 거야.  고대 고구려의 강역이 중국, 조선, 한국의 현재 영토에 있기 때문이지.  한국인은 이러한 역사를 독점하고자 하나, 중국과 명확히 선을 그으려고 나서면, 결국 1천여년의 부속국이 될 뿐이라는 점을 생각 못한 것에 다름 아니지. 체면이 말이 아닌 거야.

3. (역주: 중국 동포가 쓴 글인 듯) 옳지 않아. 고구려의 영도자는 부여국의 왕자이지만, 그가 건립한 국가의 백성은 매우 많았어.  북방에는 한족, 말갈족 등이 있었고, 반도 부분에는 조선토착인(고조선 유민)이 있었어.  그리고 이후 고구려의 도성은 현재의 조선 평양에 자리잡았어.  그래서 나는 고구려인을 부여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아아, 거짓된 간도가 있더라도.  나는 한국인 왈 "중원인이 고구려로부터 작위를 수여하도록 강요받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 고구려는 당시 매우 화나 있었어. 그리고 너는 고구려가 초기에 지방의 현(縣)급 정권이었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구려는 매우 초기에도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어.  예컨대 네가 글에서 이야기한 장수왕이 그래.  또한 약 4-44년의 대무신왕도 그렇고.  이는 모두 역사서에 기재된 것이야.  이는 어찌 된 이야기일까?  지방정부가 "왕"의 칭호를 사용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하지?  심지어 태왕이라고 불렸는데?  내가 기억하기론 고구려 역사상 30여명의 태왕이 있었어.  나는 고구려가 너희들이 말하는 어떠한 지방정권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해.  그게 아니고, 독립된 정권이었어.  조공했단 말은 어느 책에 기재되어 있는거야? (역주: 아쉽게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내용 중 한 1/5은 조공했단 얘기임.)  나는 일본인을 믿지 않아.

내가 기억하기에 삼국시대에 관씨 성을 가진 위나라 대장이 고구려를 정벌했던 것 같아.  당시 고구려가 패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고구려가 여하한 지방정권이 절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는거야.  지방정권이 정벌을 요한다고 누가 말할 수 있지?

4. 고구려백과를 참고해봐.
http://baike.baidu.com/view/5801.htm [새창에서 열기] (역주: 바이두 백과인데, 잘 나가다가 후반부에 새로 집어 넣은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왜곡으로 가득차 있음)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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