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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철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sixma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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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1월 ‘신동아’는 ‘태권도 황제’ 김운용 회장의 퇴진과정을 심층취재했다. 지난해 태권도계는 2월 파행인사에 이어 4월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승부조작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에 대해 김회장이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1년 내내 분규에 휩싸였다. 김회장을 지지하는 세력과 ‘범태권도 바로세우기 운동연합(운동연합)’측은 배수의 진을 치고 맞섰다. 오랜 힘겨루기 끝에 김회장의 일선 퇴진으로 파국은 막았지만, 불씨까지 완전히 꺼진 건 아니었다. 한국 태권도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대한태권도협회(대태협)와 국기원, 그리고 세계연맹 등이다. 이 가운데 대태협은 얼마전 이윤수 의원과 구천서 전의원이 표대결을 벌여, 구 전의원이 회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세계연맹은 2001년 총회에서 김회장이 4년간의 임기를 보장받은 상태다. 문제는 국기원인데, 김회장은 지난해 ‘운동연합’ 회원들이 데모를 벌이던 도중 국기원장에서 물러났다. 2001년 태권도 사태의 후유증은 컸다. 우선 김회장과 함께 한 시대를 이끌어온 엄운규 국기원 부원장이 운동연합의 퇴진 요구를 받아들였다. 또한 엄부원장의 오랜 측근이었으며, 국가대표선발전 당시 심판배정 등에 관여했던 임윤택 세계연맹 사무차장은 업무방해 및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그런가 하면 김회장과 아들 정훈씨는 사법 당국의 내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종우(75) 국기원 부원장은 엄 전부원장과 함께 ‘김운용 신화’를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김회장을 태권도계에 끌어들인 장본인이며, 대태협 국기원 세계연맹의 요직을 거치면서 태권도 분파를 통합해 새롭게 형틀을 만들고 경기화를 추진했다. 엄부원장이 조직을 담당했다면, 이부원장은 김회장의 브레인이라는 것이 태권도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김회장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2002년 3월5일 기자는 국기원으로 이부원장을 찾아갔다. 그와의 네번째 만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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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욕심 없다” | ||
―태권도계가 1년째 파행을 겪고 있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김운용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일부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지난 1년 동안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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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의 업적과 실수 | ||
―태권도계에서는 김운용 회장을 박정희 전대통령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공이 컸던 만큼 과도 많았다는 지적인데, 부원장께서는 어떻게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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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을 다루는 것도 기술 | ||
―지난해부터 김운용 회장의 행보를 보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오히려 긁어부스럼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재를 털어서 국기원을 지었다’는 발언이 대표적인 경우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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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플레이는 없습니다” | ||
이부원장의 입에서 ‘가지치기’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승부조작의 대표적인 유형으로, 라이벌이 될 만한 상대를 일찌감치 탈락시키는 편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선수에게 강한 A선수가 있다면, A를 예선에서 떨어뜨려 한국 선수의 우승을 돕는 것이다. 체육계에서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 당시 일부 투기종목에서 이러한 ‘가지치기’가 있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이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경우는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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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기계로 판정해야 한다 | ||
이부원장은 자신이 간접적으로 승부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고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지만, 공정한 행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난해 태권도계가 파문에 휘말린 직접적인 도화선도 국가대표선발전에서의 편파판정 시비였다. 이부원장은 태권도의 애매한 판정기준을 보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대비책을 준비해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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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법 1단에서 태권도 9단으로 | ||
이종우 부원장은 1928년 서울 창신동에서 태어났다. 이부원장의 부친은 경기도 이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이사왔는데, 천도교 대표로 독립운동을 했던 손병희 선생의 행랑채에 살았다고 한다. 1949년 이부원장은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 응용미술과에 들어갔는데, 이듬해 6·25가 터지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무도계에 입문했다. 미술대를 지원한 것은 ‘전과’를 위한 수단이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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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용에 태권도 6단 선물 | ||
이부원장은 지난해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회장이 태권도계에 들어온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이부원장은 당시 김회장의 정치력을 활용해 태권도계의 분파를 정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태권도인들은 그와 다른 주장을 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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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희와의 인연과 악연 | ||
최씨는 1972년 캐나다로 망명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엇갈린다. 상당수 남측 태권도인들은 최씨가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공금유용 혐의를 받고 귀국조치를 당했으며, 김운용씨가 태권도계에 들어오자 위기를 느끼고 외국으로 도망쳤다고 말한다. 반면 최씨는 2001년 발간된 ‘태권도와 나’에서 “3선개헌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과 부딪히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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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태권도 통합에 반대한다 | ||
‘태권도와 나’에는 이부원장에 대한 최홍희 총재의 불편한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심지어 이런 표현까지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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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 | ||
반면 국기원 기술심의회 김병운 의장과 경희대 최영렬 교수가 감수한 ‘신편 태권도 대백과’(2001)에는 태권도의 가라테 유입설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문구가 들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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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태권도와 가라테의 차이 | ||
―태권도의 경기화를 추진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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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던져라 | ||
한국태권도는 현재 수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권도가 건국 이래 최고 히트를 기록한 문화상품이라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 태권도 인구는 무려 5000여 만명에 이른다. 태권도가 민간외교에 기여한 부분과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에 끼친 효과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태권도의 역사성과 한계에 대한 논의는 좀더 미래지향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태권도는 앞으로도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이자 스포츠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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