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사나 드라마 제작사들은 여전히 낡은 배급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어요. 미국에서 한국 드라마나 방송을 실시간 시청하려 해도 주요 방송사 홈페이지는 인터넷 실명제 때문에 외국인이 로그인하기 무척 어려운 공간입니다. 드라마 파일을 유료로 제공하는 곳도 미국에선 찾기 힘들어요. 따로 제휴를 하려 해도 목돈을 요구하니, 벤처기업들은 엄두를 못 내고요. 등록이나 결제를 하려면 인터넷 익스플로러(IE)를 써야 하죠. 미국도 소비자가 좀 더 디지털 콘텐츠에 쉽게 접근하는 쪽으로 계속 바뀌고 있는데, 한국 기업들도 이런 점을 고려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얼굴만 한국사람인 젊은 여성 기업가 앞에서 새삼 부끄러워졌다. 조이스 킴(31), '김주란'이란 한국 이름을 가진 이 여성은 영어권 최대 한류 소개 웹사이트 '숨피'(soompi)를 운영한다. 27살에 창업해 올해로 4년째를 맞은 벤처기업 CEO다. 일찍 미국으로 이민 간 한국인 부모님 덕에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배웠다.
집에서도 모두 영어로 대화하는 탓에, 머리가 굵어질 때까지 한국말을 전혀 못했다. 1997년 미국 코넬대를 졸업하고 이듬해 한국을 처음 찾았다.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하며 한국말을 배웠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대학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다시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로 활동하다, 2006년 벤처기업가로 변신했다.
한국과 미국 경계에 선 이방인의 삶을 떠올릴 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제가 어릴 때만 해도 백인 친구들이 동양 아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욕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요즘 어린 학생들은 다릅니다. 동양인을 존중하고, 멋지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죠.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저는 그게 한국 대중문화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숨피는 '한류'로 불리는 한국 대중문화를 다루는 웹사이트다. 지인이 1998년부터 개인 홈페이지로 운영하던 공간이었는데, 2006년 조이스 킴이 합류하며 '숨피 미디어'란 법인으로 모양새를 갖췄다. 2009년 9월 한국 대중문화 웹진으로 본격 출발해 지금에 이르렀다. '숨피'란 이름은 공동창업자인 홈페이지 주인장 별명이다.
한국인 교포들이 심심풀이 삼아 들락거리는 공간으로 봤다면 잘못 짚었다. 한 달 방문자만 120만명. 이 가운데 한국인은 10% 안팎일 따름이다. 파란 눈, 희고 검은 피부색, 낯선 말로 대화하는 사람들이 숨피에 들어와 '한류 스타'를 보며 열광하고 환호한다. 이 숨피 '슈퍼팬'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며 전문가 못지 않은 분석글을 웹사이트에 올리고, 새로운 한류 소식을 트위터로 퍼뜨린다. 한국땅 한 번 안 밟아본 이들이 한국말을 술술 토해낸다. 한국 드라마를 보고, 한국 노래를 배우며 자연스레 한국 문화에 젖어든 덕분이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조이스 킴이 왜 굳이 '한류'에 매달리는 걸까. "한국 대중문화의 잠재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했어요. 젊은이들이 관심 있어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인터넷을 주도하는 계층이 젊은이들이잖아요. 요즘 미국 젊은이들은 '할리우드는 낡았다'고 생각해요. 동양 대중문화에 관심들이 많죠. 한국 대중문화를 외국인에게 알리는 게 곧 한국 위상을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숨피에선 사진도, 글도, 동영상도 이용자들이 직접 올린다. 정규 직원 4명에, 에디터 역할을 맡은 자원활동가 40명이 웹사이트 운영을 돕고 있다. 조이스 킴 CEO가 한국을 드나들며 국내 대중 스타 인터뷰도 직접 하고, 미국 진출을 꿈꾸는 제작사나 기획사를 대상으로 컨설팅도 병행한다. 이런 식으로 1년에 적어도 한 번은 한국을 꼭 들른다.
올해엔 시기가 잘 맞아떨어졌다. 그 덕분에 '스타트업 위크엔드 서울' 행사 강연도 맡았다. 직접 부딪히며 느낀, 한국 인터넷 기업과 실리콘밸리 기업의 문화 차이를 알려주고 싶었단다. 잠깐 옆길로 새 보자.
"한국 벤처기업은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요. 창업에 앞서 발표자료 만들고 회의하며 6개월 넘게 보내죠. 미국은 서비스가 완벽하지 않아도 빨리 런칭하고, 나중에 고치고 완성해나갑니다. 하향전달식 의사소통도 문제에요. 미국은 개발자와 창업자가 편하게 대화하고 합의해서 정책을 만들지만, 한국은 CEO가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리죠."
창의성을 빼앗는 근무 환경에도 일침을 가했다. "한국에선 개발자 개인 시간이 거의 없어요. 미국에선 개발자에게 개인 시간을 여유 있게 주고, 거기서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트위터도 비슷한 사례잖아요. 또 일을 재미있게 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개발자가 결정권이 없는 편입니다. 자유가 없으니 일이 재미없고, 성과도 안 나오게 되는 겁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패 경험을 사회적 자산으로 바꾸는 기업문화란다. "미국엔 '페일컨'(FailCon)이란 컨퍼런스가 있어요. 실패한 사람끼리 경험을 나누고 사례를 발표하는 컨퍼런스죠. 한국에선 한 번 사업에 실패하면 연락을 끊고 숨어버리는데요. 미국은 실패한 사람은 다음에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투자자들도 그런 CEO를 선호합니다."
조이스 킴 대표는 한국 대중문화를 영미권에 널리 알리는 일을 스스로 자랑스러워한다. 잘 나가던 변호사 일을 그만두고 이른바 '딴따라' 분야에 뛰어든 것도 후회하기는커녕 떳떳해한다. 그러면서 "정작 한국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걸 경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적잖다"고 꼬집었다. 한국도 문화산업 가치를 인정하고 널리 키우려 하지 않나, 가볍게 항의했다가 또 한 방 먹었다. "문화산업을 키운다면서 영화나 음악, 책 같은 품위를 놓지 않으려 하죠. 그런데 죄송하지만, 미국 젊은이들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어요." 낯선 땅에서 나고 자란 젊은 여성이 한국을 자랑스러워하고, 한국 대중문화를 사랑하고 알린다. 한국에선 제 나라 국민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려드는데.
"미국에선 한류 때문에 동양인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한국말 하는 사람이래야 몇몇 교포밖에 없었는데요. 3년 전부터는 백인, 흑인, 중국인 친구들이 제게 한국어로 말을 겁니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은 경제적 효과도 큽니다. 미국 젊은이들은 현대자동차를 타고 삼성 휴대폰을 쓰지만, 그것 때문에 한국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아요.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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