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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연합뉴스) 심언철 기자 = "할아버지는 '좋은 미국시민이 되라. 한국의 뿌리는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24일 오전 경기도청에서 열린 199회 경기포럼 강사로 콧수염을 기른 중년의 백인 남성이 나서자 객석이 일순 술렁였다.

이날 강의는 '도산 안창호-글로벌 코리아의 선구자'를 주제로 도산의 외손자가 직접 강사로 나설 예정이었기 때문에 백인 남성이 강단에 오르는 것이 의아했기 때문이다.

객석을 천천히 지나 강단에 서서 목례를 한 필립 안 커디(Philip Ahn Cuddy.54) 씨는 서툰 한국어 발음으로 "반갑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손자 필립 안 커딥니다. 한국말 조금밖에 못해 죄송합니다"라며 강의를 시작했다.

필립은 도산 부부의 딸, 안수산 여사가 아일랜드계 미국인과 국제결혼해 낳은 아들로 도산에겐 외손자가 된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굿 사마리탄 병원'에서 병원장 고문으로 일하고 있으며 도산기념사업회의 부위원장직도 맡고 있다.

1885년 세워진 굿 사마리탄 병원에는 80여명의 한국인 의사가 일하고 있고 매달 100명 가량의 교포 신생아가 태어난다.

필립은 또 미국 버클리대학에 도산 디지털 도서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고 캘리포니아의 한국어 학교에서는 현지의 4∼10세 아동들에게 한국역사를 가르치기도 한다.

그는 스스로 '한국인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외모와 절반의 '한국 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국을 위해 일하는 이유를 '팔자'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그는 "할아버지는 한국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베풀었다면 나는 그 정신을 이어가는 역할을 맡았다"며 "도산의 이름을 이용해 벌어지는 많은 일들을 지켜볼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LA에 한국인 이름을 딴 최초의 정부건물인 도산안창호우체국과 도산안창호 인터체인지 등이 있을 정도로 미국사회에서는 도산의 의미가 크다"며 "나는 할아버지의 업적과 의미가 퇴색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감시자(Watchdog)'"라고 말했다.

미 해군 최초의 동양인 여성 장교였던 어머니를 따라 하버드 군사학교를 졸업한 필립이 도산 기념사업을 시작한 것은 도산공원과 도산기념관 건립을 위해 지난 1973년 한국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후 천안 독립기념관 설립시 도산 관련 연구를 맡았고 LA 미주한인 역사박물관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도산기념사업과 미국내 교포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왔다.

필립은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전형적인 장발이었던 나와 장발을 엄격히 규제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갑게 악수한 것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박 대통령도 틀림없이 할아버지를 존경했기 때문에 (내 장발을)참아주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앞으로 도산의 업적과 한국의 역사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한 온라인 디지털 도서관 구축 등을 계획하고 있다.

또 LA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활동과 독립운동기념사업, 독립운동가 유가족 지원사업 등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한국 정부는 우리 가족처럼 해외에 살고 있는 애국지사 유가족들에게 지나치게 무관심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일제시대 도산 혼자 귀국한 뒤 미국에서 계속 살아온 도산의 부인 이혜련 여사를 비롯한 가족들은 그동안 독립유공자 유족 지원에서 계속 소외돼 왔다.

법이 개정되며 3년 전부터 연금을 수령하게 됐고 이 여사는 지난해에야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

필립은 "할아버지는 '좋은 미국시민이 돼라. 그러나 한국의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를 가족들에게 남기고 한국으로 떠났다"며 "이는 우리 가족뿐 아니라 모든 이민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라고 말했다.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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