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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소속 장로교단만 해도 예장(통합), 예장(합동), 예장(정통), 예장(합동정통), 예장(개혁A), 예장(개혁 B), 예장(호헌 A), 예장(호헌 B) 등이 있고 한기총 가입교단 외에도 100여 개에 육박하는 장로교단이 있다. 감리교나 성결교의 경우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예수교대한감리회(예감),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한국에 교단이 난립하는 이유
이처럼 교회전문가들조차 혼란을 느낄 정도로 기묘한 이름의 교단이 난립한 것은 역사적 배경과 교리적 이유, 구성원들의 사적인 이익추구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최초 분열은 신사참배와 관련이 있다. 1940년대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일제에 굴복해 신사참배를 했으나 장로교의 주기철, 손양원 목사 같은 인물은 끝까지 참배를 거부했고 주기철 목사는 옥중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해방 후 신사참배는 한국교회의 주요한 이슈가 되었고 참배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던 목회자와 신도들은 참배자들의 참회와 근신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장로교단의 주류를 형성했던 참배자들은 교단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면서 오히려 출옥자들을 공격했다. 양측의 공방은 서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극단적인 용공논쟁으로 이어지기까지 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장로교 주류는 출옥자들을 단죄했고 출옥자들 역시 주류인사들을 정죄하면서 자신들만의 교단을 만들어 이른바 예장 고신파를 만들었다.
신사참배문제로 1차 근본분열을 일으킨 한국교회는 이번에는 진보-보수간의 신학논쟁으로 분열했다. 이 논쟁의 중심에는 김재준 목사와 박형룡 목사가 있다. 함경도 출신인 김재준은 근본주의 선교사들이 전해준 기존의 장로교 교리를 극복하기 위해 토착화된 자유주의 기독교를 추구했다. 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1940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교)를 세우고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을 추구하는 성서비평학(고등비평)을 가르쳤다. 그의 성서해석학은 당시 교회와 신학계를 떠들썩하게 했고 보수적 신학을 강조하는 기성교단의 반발과 공격을 불러왔다.
보수 쪽에서 김재준 목사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인물은 박형룡 목사였다. 오늘날까지 보수신학의 거두로 불리는 그는 평북 출신으로 김재준과 마찬가지로 프린스턴에서 공부했다. 그레샴 메이첸을 비롯한 일군의 근본주의 신학자들 밑에서 수학했던 박형룡은 1947년 장로교총회 때 김재준과 조선신학교의 자유주의 신학이 성서무오설을 비판하고 성서의 권위를 파괴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소요가 일어나자 같은 평안도 출신 목사들과 함께 1948년 6월 서울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했다.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대립하는 가운데 1949년 35차 총회에서 박형룡의 장로회신학교가 직영신학교로 승인을 받으면서 조선신학교는 사실상 '직영 취소' 처분을 받았다. 1951년 전쟁 중에 진행된 36차 총회에서는 두 신학교의 직영을 취소하고 대구에 총회 직영의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자는 안이 통과되었고 같은 해 9월 총회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교수와 직원 대부분이 사실상 장로회신학교 출신으로 채워지자 이에 반발한 조선신학교 측이 36회 총회의 회의진행 방법과 신학교 설립의 불법성을 제기하며 강력하게 항의했고 총회 결정에 불복해 1952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을 세웠다.
1952년 37차 총회는 김재준을 면직처분하고 조선신학교 출신 교역자의 채용 금지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1953년 김재준을 지지하는 인사들은 장로교 총회로부터 갈라져 나와 자신들이 '한국 장로교 법통의 총회'라고 선언하고 1954년 그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현 한국기독교장로회)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학논쟁으로 갈라졌던 김재준과 박형룡은 신학뿐만 아니라 정치적 견해로 대립관계를 유지했다. 김재준은 1961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영구집권의 야욕을 드러내자 1969년 8월 15일 삼선개헌 반대서명을 하는 등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다. 이에 반해 박형룡은 조용기, 김준곤 등 242명과 함께 삼선 개헌 반대는 '교인들의 양심의 혼란을 가져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9월 대한기독교연합회 이름의 3선 개헌 지지 성명에 참여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세계교회협(WCC) 가입건으로 예장, 감리교, 성결교 대분열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1·2차 근본분열이후 이번에는 교회연합(Ecumenical)운동을 대표하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문제로 장로교는 물론 감리교, 성결교까지 갈라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WCC가입을 둘러싼 한국교회의 대분열은 레드 콤플렉스 때문이었다. 미군정과 한국전쟁 기간을 거치면서 강화된 한국교회의 반공주의는 한국 교회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었고 이것을 무기로 분열을 조장한 인물이 미국의 근본주의자 칼 매킨타이어 목사였다.
그는 어떤 근본주의자보다 강경한 인물로서 1948년 창립한 WCC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해 복음주의(Evangelical)의 단결을 지향하는 국제기독교교회협의회(ICCC)를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맥킨타이어는 WCC 가입 교단인 1959년 미국교회협의회(NCC-USA)가 미국정부에게 중국의 UN 가입을 지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자 WCC와 NCC를 용공집단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고 한국에서 예수교장로회가 WCC 가입 문제로 논란에 휩싸이자 곧바로 방한해 박형룡 등 보수 측 인사들과 반WCC운동을 펼쳤다.
결국 예수교장로회는 격렬한 논쟁 끝에 맥킨타이어에 동조해 가입을 반대한 세력은 예장합동으로, 가입을 지지한 측은 예장통합으로 각각 딴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이후 맥킨타이어는 예장합동의 총회신학교 설립을 위해 재정 지원을 했고 그것이 현재 서울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이 때 교장이 된 박형룡 목사는 1970년대 초반까지 교장으로 복무했다.
맥킨타이어는 1961년에도 WCC 가입을 둘러싸고 감리교와 성결교총회가 대립하자 교단내 보수파를 설득해 가입반대를 선동했다. 결국 감리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와 예수교감리회(예감)로, 성결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로 갈라졌다. 이때의 분열을 '칼'(Ecumaeni-Cal)과 '칼'(Evangeli-Cal)의 분열 또는 '기독교'(기감, 기성)와 '예수교'(예감, 예성)의 분열이라고도 한다. 이때부터 일부에서 한국은 예수교 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를 포함해 '예수'(예장, 예감, 예성)와 '그리스도(기독)'(기장, 기감, 기성)가 싸우는 이상한 나라가 되었다고 비꼬기도 했다.
3차 대분열 이후에도 한국교회는 개혁적인 기장, 감리교, 예장통합에 비해 보수교단인 예장합동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소교단이 갈라져 나왔다. 세속적으로는 개혁·진보진영이 분열이 심하지만 교회 쪽은 오히려 진보·자유주의적 입장을 가진 교단이 신학적으로 유연성을 발휘해 갈등이 적고 보수교단이 신학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분열이 왕성한(?) 편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다는 성서 무오설을 중심으로 신의 절대권과 섭리 강조,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강한 믿음, 은총에 의한 거듭남의 강조, 금욕적이고 엄격한 삶의 강조, 타종교와의 대화 거부나 분리 등을 주장하는 강경한 입장의 근본주의자가 있는 한 보수 기독교의 분열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종교권력자들에 의해 찢겨진 '예수 그리스도'
미국에서도 1920년대 자유주의 신학과의 논쟁에서 패배해 뉴욕의 프린스턴대학에서 철수한 메이첸·반틸 같은 근본주의 신학자들이 뉴욕인근의 필라델피아에 웨스터민스터 신학교를 세우면서 분열의 싹을 키웠다. 그들은 장로교단마저 자유주의자들이 지배하자 지지자들을 규합해 1936년 정통장로교회 설립했다. 정통장로교회도 종말론과 신자 생활의 경건성 등의 문제로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으로 긴장관계가 형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대부분 교수들은 술과 담배, 극장 출입 같은 문제들은 개인의 자유에 속한다며 이를 규제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칼 맥킨타이어같은 인물들은 좀 더 엄격한 잣대를 요구하면서 성서장로교회와 페이스신학교를 세우며 정통장로교회와 갈라섰다. 이때부터 '이탈과 분리'는 근본주의 운동의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물론 교회 분열이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교황권과 면죄부문제, 상업경제의 등장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분리했고 개신교내에도 지역과 역사적 상황에서 따라 장로교·감리교·침례교·성공회 등이 생겨나면서 신앙과 신학이 풍부해졌다. 하지만 크고 작은 교단 수만 200여 개가 넘는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신학과 교리상의 이유도 이유로 갈라지기도 하지만 지역과 재산, 인맥문제 등으로 갈라선 경우도 많다.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한 선교사 역시 한국교회 분열에 일조를 했다. 선교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지 충돌과 경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먼저 중국에서 활동했던 네비우스 목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지역분할 선교 정책을 추진했다. 일명 네비우스 정책으로 남장로교는 전라도와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 선교회는 함경도, 북장로교는 평안도, 황해도 및 경상북도를 분할해 전도활동을 벌였다.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한 함경도 출신의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장로회(기장)를 설립했으며 호주 장로교의 선교 지역이었던 경남에서는 예장 고신파가 형성되었다. 195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로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으로 분열한 것도 남·북장로교의 선교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1948년 WCC의 창립회원이 된 북장로교 선교 지역의 인사들과 교회는 예장통합으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남장로교 선교 지역의 인사들과 교회는 예장합동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최근 들어 예장 통합과 예장 합동 등 장로교를 중심으로 장로교협의회를 구성해 통합하려는 분위기 생겨나기도 했지만 쉽게 통합될지는 의문이다. 이미 기득권이 되버린 교단구조를 허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감리교의 경우는 최근에는 막대한 금력과 인맥을 가졌지만 형법(벌금형)으로 처벌받은 적이 있는 김국도 목사의 감독회장(총회장) 선출을 두고 교단이 분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김국도 목사는 감독회장으로 당선될 경우 진보성향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탈퇴하고 보수를 대표하는 한기총에 가입하겠다고 선언해 진보·개혁인사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만약 김 목사가 당선되면 감리교는 60년대처럼 다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는 형국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한국사회에서 개신교가 '개독교'로 불리는 이유는 종교의 본질을 망각한 물량주의, 배금주의, 배타적 선교, 일부 목회자들의 범죄와 함께 수없이 난립한 교단간의 무분별한 경쟁 때문이다. 교단 난립에는 교단 분열도 있지만 무자격 목회자들이 스스로 목사가 되기 위해 설립한 교단도 한 몫을 한다. 무자격 목회자들의 경우는 기성교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성장에 매진하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한국교회가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양식 있는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윤리자정선언을 통해 교회예산의 사회환원, 세습반대, 유산안남기기 운동을 펼치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여전히 강남과 수도권 일대에서는 대기업 할인점과 SSM(Super Super Market)이 지역 상권을 초토화시키듯이 대형교회 지부(지교회)들이 지역교회를 짓누르고 있다. 지역교회에서는 지교 회들을 반대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이 이를 무시하면서 갈등은 점점 고조되고 있다. 이제는 지역 차원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름 없이 작은 자로 세상에 와서 소외된 자들을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는 크고 거대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예수'와 '그리스도'로 찢겨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가 자기편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수만에서 수십만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하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 곳을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태복음 7장 13~14절)
예수의 몸을 십자가 매달고 창으로 찌르면서 갈기갈기 찢으려 했던 로마 권력자들처럼 오늘날도 탐욕으로 가득찬 종교권력자들 역시 같은 길을 가고 있다. 그만큼 한국교회에게 미래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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