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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과 남편, 내 맘도 몰라주고 참 서운해요

  
산소의 면적이 넓어 여러 명이 벌초를 하고 있습니다.
ⓒ 임윤수
벌초

 보름 전 쯤 벌초 문제로 어머니와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 가게 일을 하는 나에게 느닷없이 평일에, 그것도 내일 당장 벌초를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남편과 큰 시동생이 돌아오는 일요일에 가자고 이미 날짜를 잡은 터였다. 그런데 막내 시동생이 일요일에 쉴 수 없어 회사를 하루 쉬기로 했으니 바로 가자신다. 월급 받아먹는 시동생은 맘대로 쉴 수 없지만 제 장사라 맘대로 쉴 수 있는 속편한 형들이 그에 맞추라는 거였다. "조상 제대로 모시지 않는 놈치고 잘 되는 놈 없더라!"라는 악담까지 덧붙이신다.  

시간이 안 되면 할 수 없는 거지. 회사를 쉬면서까지 가야 한다고 누가 볶아치기라도 했나. 남편은 이제까지 벌초를 거의 가지 않던 막내 시동생이 형들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제 좋은 날로 잡아놓고 생색을 내는 것이 생각할수록 괘씸하단다. 시동생이야 하루 쉰다고 월급이 깎이지 않지만 장사하는 사람에게 가게를 하루 쉬는 것은 다르다. 큰 시동생도 기가 찰 노릇이란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억지를 부리는 이유는 사실 다른 데 있다.  


"큰며느리가 명절 전날까지 일을? 제사 다 때려치울란다" 

9월 한 달 간 약간의 여유가 생겼던 나는 여름에 이전한 남편 가게도 도와주면서 명절 때까지 책이나 실컷 보고 산에도 다니면서 보내자 싶었다. 그런데 친구가 한 달간만 자기 좀 도와달라고 했다. 어머니도 남편도 아는 친구다. 수년 전 우리 집에 불이 났을 때 도와줬던 친구라 도움을 청해준 게 내심 고마웠다.  

남편이 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간병인을 쓸 수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당장 구하기도 어려운데 가게를 한 달 넘게 비울 수 없어 고민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게를 해 본 내가 도와주면 좋겠다는 거였다. 친정 동생이 가게 일을 봐줄 수 없는 수~금요일 6~7시까지만 봐달라고 했다. 남편 혼자 가게를 꾸려가고 있고, 청소년기두 아이를 둔 처지에 한 푼이 궁했기에 나도 흔쾌히 대답했다.  

젊은 새댁들이 주 고객이라 경우에 따라 경우에 따라 속으로 꾹 눌러 참고 듣기 좋은 소리를 우선 앞세워야 할 때도 있었지만 친구 돕자고 와서 손님을 잃을 수는 없었다. 며칠 일 하면서 날짜를 짚어보니 명절 전날까지 봐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순간 어머니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말을 꺼냈는데, 어머님의 대답은 이랬다.


 "아니! 큰 며느리가 돼 가지고 아무리 그렇다고 명절 전날까지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다니? 그 사람들은 명절도 안 지낸다니? 그리고 제사 지낼 사람이 병원에 가서 피를 보고 오다니 너 제정신이니? 나도 이제는 제사고 뭐고 다 때려치울 거니까 너들 알아서 해라…." 


'뭐 내가 공짜로 봐주나? 공짜로 봐준다고 해도 그렇지. 수술한 환자(피)를 봤으니 부정 탄다는 건 뭐야? 굴관조복을 하던 조선시대도 아니고… 병문안도 가지 말라는 건가. 이날 이때까지 내가 언제 명절날 힘들다고 꾀 한 번을 부려봤어, 친정엘 마음 편히 갔었어?'

 어머니 말씀대로 사정이야 어떻든 며느리로서 참 죄송스런 일이다. 하지만 결혼 15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내 사정을 앞세운 적이 없으니, 친구의 딱한 사정을 헤아려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좀 이해를 해주셨으면 하는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다. 이해 못할 잔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결국 어머니는 화를 내며 가셨고 그리고 며칠 후 벌초 문제가 불거진 것이다. 

  
▲ 고향가는 길 고향가는 귀성열차, 손님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올해 설 귀성객 모습.
ⓒ 최윤석
귀성열차
 

결혼 15년차 맏며느리, 친정 가본 건 겨우 5번 

그리고 며칠째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그간 명절 때마다 며느리, 큰며느리라는 이유로 꾹꾹 눌러 참았던 것들, 아랫동서들이 멋대로 해도 명절이니까 큰소리 나지 않게 하고 싶어 꾹꾹 눌러 참았던 감정들이 틈틈이 비집고 나와 거의 매일 우울했다. 일을 하다가도 그동안 눌러 참았던 것들이 떠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힘이 쭉쭉 빠지곤 했다.  

내 고향은 김제다. 며칠 전에는 한동네에서 자란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자랄 때 <꺼벙이와 꺼실이>(길창덕)이란 만화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많고 선머슴아 같은 그 애는 '꺼벙이', 얌전한 나는 '꺼실이'라고 부를 만큼 우린 함께 있는 날이 많았다. 이렇게 친했던 친구가 내 연락처를 수소문, 반가운 마음만 앞세워 그 늦은 밤 전화를 한 것이다.  

그에겐 친정 피붙이 하나 살지 않는 고향 마을이지만 내가 친정에 가면 날 만나러 오겠노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15년만이었음에도 무척 낯익었다. 친구는 오랜 그리움으로 글썽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난 "이번에는 연휴도 짧고 아이들 시험도 바로 그 다음날부터"라는 거짓 핑계를 대고 목까지 차오르는 서러움을 꾹꾹 누른 채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밤새 마음이 쓰리다. 결혼 15년이 넘도록 추석이나 설에 친정에 간 것이 몇 번이던가. 헤아려보니 겨우 손가락 다섯 개다. 내년이면 팔순에 접어드는, 몇 년 전 죽음의 고비를 한 번 넘겼던 친정아버지가 그립고 지난해 수술한 엄마의 다리도 자꾸 떠올랐다. 거기에 얼마 전 어머니와 있었던 껄끄러운 것들까지 복잡하게 뒤엉켰다. 

남편은 3형제 중 맏이이다. 결혼 초에는 나 역시 명절이면 친정에 어떻게든 가려고 아득바득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친정에 가는 것을 내 스스로 포기했다. 평소 3~4시간이면 족히 갈 수 있는 친정이지만 명절이면 12시간은 예사로 걸리는 터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명절 날 나선다는 것이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이번에는 시골에 꼭 가야지!' 해보지만 이런 계획은 명절 직전에 여지없이 깨지곤 했다. 자동차 관련 가게를 하다 보니 명절 전날까지 바빴고 어떤 때는 명절날 단골손님이 급하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몇 년간, 2004년에 당한 화재의 공백을 메운다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친정 가는 것이 경제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했다.

 

명절 전날 밤 도착해 차례 상 물리자마자 친정 가는 동서들 

  
추석 차례상
ⓒ 김현장
차례상

한 번은 어머니께서 시어른 쪽 사촌이며 육촌들을 명절에 잔뜩 불러 모았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명절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동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동서는 그렇게 친정에 갔고, 난 할 수 없이 모처럼 연휴가 길어 친정에 가려던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명절날 큰며느리가 손님을 대접해야 체면이 선다나. 또 한 번은 연휴 첫날 고속도로를 보며 "저렇게 막히는데 그 먼 전라도까지 언제 갈 거냐?" 하셨다. 안 갔으면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누가 가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먼저 친정 길을 포기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내 맘과 내 사정을 알기나 하는지, 나와 결혼 햇수가 비슷한 손아랫동서는 차례 상 물린 후 설거지도 하지 않고 친정으로 도망치곤 한다. 이제 3년 남짓 된 막내 동서 역시 도망치기 바쁘다. 두 동서의 친정은 부럽게도 경기도와 서울이란다. 

그런데 정말 섭섭한 것은 동서들이 설거지를 함께 하고 가려고 해도 "어서 빨리 가라"는 시어머니의 재촉과 그걸 뿌리치지 않고 기회는 이때다! 날름 도망쳐 버리는 두 동서다. 가만 생각해보면 처음 몇 년간 손아랫동서는 내 입장을 우선 헤아리곤 했었다. 이런 동서를 막무가내로 떠밀어 보낸 것은 운전하고 갈 시동생만을 헤아린 어머니였다.

내가 먼저 동서를 배려하기도 했다. 살림이 궁한 집안의 같은 며느리라는 동질감과 함께 어차피 나는 멀어서 못가고, 손님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니 동서만이라도 어두워지기 전에 친정에 들어섰으면 좋겠거니 싶어 주방으로 들어서는 동서를 떠밀어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것들이 모두 억울해지는 것을 어쩌랴!
 

"그럼 동서 보고 좀 일찍 와서 일 좀 하라고 해요. 작년처럼 밤 8시에나 나타나지 말고. 차례 지내는 날 아침에 나타나는 며느리들이 어디 있대요? 왜 동서들한테는 아무런 말도 안 하시는데요?"  

"걔네들하고 너하고 같니? 너는 큰며느리 아니냐? 그리고 걔들은 직장 생활 하지 않냐."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단지 큰며느리라는 것을 앞세우는 것이 기분 나쁘다. 차례고 제사고 큰며느리인 나만 알아야 하고 나머지는 알 필요조차 없다는 듯, 두 동서가 언제 오든 크게 상관하지 않던 어머니, "지금이 몇 시인데 올 생각을 안 한다"고 펄펄 뛰다가도 그럴싸한 핑계와 함께 봉투를 내밀면 눈 녹듯 사르르 녹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무슨 놈의 직장이 이 시간까지 여자들을 잡아 놓는다니? 그 사람들은 명절도 없다니?…하기야 하루 종일 서서 일했으니 좀 힘들겠니?… 에미야, 좋은 날 공연히 시끄럽게 하지 마라. 내가 나중에 앉혀놓고 말할 테니! "

 

어느 때는 이른 아침부터 음식준비로 바쁘게 허덕이는 내 눈치를 보면서 이렇게 나서서 두둔하기도 했던 어머니가 결혼 이후 처음으로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명절 전날까지 일을 해야 한다는 내게 큰며느리라는 이유만으로 어찌 이렇게 화만 내실 수 있을까?

 

어머님과 남편, 내 맘도 몰라주고 참 서운허요 

처음 얼마간은 나 역시 이런 동서들이 못마땅해 어떤 결단을 내리려고도 했었다. 그러나 큰며느리의 도리만을 내세우는 어머니가 번번이 방해꾼이 되었다. 기분이나 뇌물에 따라 180도 달라지는 어머니의 심리를 잘 아는 이런 어머니의 심리를 이용하여 막내 동서는 지난 추석에는 저녁 8시에, 설에는 밤 11시에야 나타났다.  

이런 지경이고 보면 사람의 도리를 알 만큼 아는 나이의 동서들에게 '자식의 도리'니 '명절 때는 어쩌고' 잔소리 하는 것조차 언제부턴가 귀찮아졌다. 명절이 힘들만큼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내 할 일만 하면 될 것, 사람은 제가 하는 만큼 느끼고 사는 거려니 싶기에 말이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동서들도 정말 괘씸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다.

 

"네 친구들 이번 추석에 외가에 간다든?"

"가는 애들도 있고 안 가는 애들도 있겠지. 안 물어 봤는데? 그런데 우린 왜 외가에 안가? 엄마도 이번에는 이모들처럼 외가에 가? 엄마는 엄마도 안 보고 싶어?" 

"아빠 힘들어서 어떻게 가니. 요즘 날마다 10시까지 일하잖아. 명절 전날까지 그럴 건데. 아빠도 좀 쉬어야지. 그리고 차도 좀 많이 막히고…."

"그럼 엄마 혼자서라도 갔다 와! KTX가 있잖아. OO이가 그러는데 그건 안 막힌다던데?" 

'철부지 내 딸아. 명절날 KTX는 우주열차를 타는 것만큼 타기 힘들단다.…우쒸! 참고 살아도 아무도 몰라주고 명절이고 뭐고 이참에 아무데나 그냥 가버려?'

 

몇 년 전 친정아버지께서 죽음을 넘나드는 위기를 겪은 이후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불안함이 늘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것이 마냥 죄스럽기만 하다.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것 같다. 

결혼생활 15년 넘도록 어머니는 내게 빈말이나마 친정에 다녀올 것을 권유하거나 물어 본적이 없다. 그러고 보면 친정 부모에게도 효도해야 한다는 말은 체면만 앞세운 순 거짓말이다. 사위도 장인장모께 효도해야 한다면서 자기 아들의 불효는 나 몰라라 며느리에게만 도리를 다하라니 말이다. 오죽하면 몇 년 전 혼자가 되어 명절마다 친정에 갈 수 있는 언니가 부럽다. 친정과 시댁이 가까워 무조건 고향에 가야하는 막내도 그저 부럽기만 하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내 스스로 고향 가는 길을 포기하고 살지만, 가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어머니와 남편이 이젠 참 서운하다. 내가 언제 명절날 일이 많다고 투덜대기를 했나. 실속 없이 큰며느리 도리만 앞세우는 어머니에게 심한 말 한 마디 했나. 친정에 못 간다고 원망을 한 적이 있나. 잘도 포기하며 살았는데 올해는 왜 이리 섭섭하기만 한 걸까? 친정에 갔다 오라고, 처가에 꼭 갔다 오자고 한 마디라도 하면 덜 섭섭하련만!

 

친정 부모님께 정말 죄스럽습니다 

마침 아는 언니로부터 명절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다. 이런 글을 쓰고 있노라, 큰며느리인 내 신세를 하소연 섞어 들려주자, 나이 많은 어른 이기려하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가 아니면 가급 이해해드리란다. 동서들 나무라거나 탓하지도 말고 기분 좋은 명절을 보내란다. 열심히 사는 남편을 봐서 참으란다. 언니의 불운한 결혼사를 잘 알고 있기에 언니의 충고가 진심으로 들린다.  

내게, 이 땅의 딸과 며느리들에게 명절은 무엇일까. 정말 이렇게 참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방법인가.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인가. 또 다른 큰며느리들도 나처럼 사나? 이제 기껏 하나나 둘만 낳는 세상에 언제까지 큰며느리라는 가부장적인 굴레를 쓰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과는 죽는 날까지 마음을 진정 섞을 수 없는 것인지…, 요즘 며칠 생각이 참 분분하고 혼란스럽다. 

고향이 어디 그리 쉽게 털어지는 곳인가. 게다가 칠순 친정 부모님이 살아계신 곳인데 말이다. "언니 말이 맞아. 알았어!" 대답은 하지만 올해도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귀성객 소식이 끝나고 그 며칠 후까지 아마 우울하리라. 올해도 가지 못한 친정과 친정 부모님을 향한 그리움과 돌아가시고 나면 한이 될 그 죄스러움으로.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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