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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목간 등 유물 잇단 출토
동아시아 교류 허브 입증
일 학자들 답사·행사 활발
'한국의 7세기 목간에 일본인 이름이!'
지난 7월7일 일본 < 아사히신문 > 에는 이런 제목의 특파원발 기사가 실렸다.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고도인 충북 부여 쌍북리에서 10여년전 출토된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을 정리하다 현재 오사카인 '나니와' 지명과 '무라지 공'이라는 일본 고대 성씨가 적힌 물품표를 확인했다는 특종. 일본 역사학계는 경악했다. 한반도 유물에서 처음 확인된 일본인 이름이자, 옛 오사카 부근에 살던 숱한 왜인들이 교역을 위해 백제를 드나들었다는 생생한 물증이 나타난 것이다.
지난 5월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목간 국제학술세미나에서는 지난해 발견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백제 목간이 소개돼 일본 학자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 목간은 흉년 때 농민에게 쌀을 빌려줘 구제하는 백제의 환곡 제도 문서로, 고대 일본에서 발견된 문서 목간과 비교 검토한 결과, 일본 고대의 환곡 제도와 명칭은 물론 나중에 쌀을 되갚는 이율까지도 상당부분 판박이임이 밝혀졌다.
지금 일본 역사학계는 '백제 쇼크'에 휩싸여있다. 지난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577년)의 사리기와 절터, 잇따라 나온 백제 목간들, 올 2월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 안에서 나온 7세기초 무왕 때의 금동사리기와 명문기 등은 하나 같이 일본 고대 아스카시대의 불교 공예 문화, 정치·사회체제의 원형과 잇닿는 사료들이다. 일본 학계의 시각틀이 통째로 뒤흔들린 건 일본 역사서 < 일본서기 > 등의 백제 영향 기록을 명백히 뒷받침하는, 연대가 확실한 새로운 물증들이 잇따라 백제 유적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일본 최초의 사찰로 꼽는 아스카데라 등 6~7세기 주요 일본 사찰들의 절집 배치 구도, 사리기의 얼개와 묻는 방식 등이 조금 이른 시기 백제 사찰들과 거의 같으며, 목간에 담긴 계량 단위나 행정 문서 내용도 상당부분 백제 것을 본따 만들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 남조 문화를 일본이 직접 수입해왔다는 설 등으로 백제를 슬쩍 폄하해온 일본 주류학계의 시선은 이제 180도 바뀌었다고 국내 연구자들은 전한다. 실제로 올초부터 부여, 공주 등의 백제 유적지에는 잇따라 확인된 새 발굴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하려는 일본 역사·고고·미술사학자들의 발걸음이 끊일 새 없다. 정림사, 왕흥사 등의 백제 절터, 목간 자료 등을 분석·토론하는 일본 내 학술행사도 전례없이 늘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더이상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한 연구자의 단언처럼 올해 문화재 동네에서 백제는 놀라운 실물 발굴 성과로 부활하면서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의 허브로서 입지를 굳혔다.
2007년부터 물꼬를 튼 백제 유산 신드롬이 올해 대세로 굳어진 것은 일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6~7세기 불교·문화 교류사의 자취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유물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요인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주목되는 것이 백제가 문물을 주로 들여온 중국쪽 남조 유적이다. 백제와 동시기 밀접하게 교류했던 난징 등지의 양·진 시대 유적만 해도 그동안 비교할만한 유적, 유물들이 빈약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재개발에 따른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백제의 불교, 공예품과 빼어닮은 각종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옛 도읍인 난징 시내의 홍토교란 곳에서는 부여 정림사터의 소조불과 거의 같은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돼 화제를 낳았다.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가 잇따르면서 '곳곳에 중국으로 달려가는 구두굽 소리가 요란하다'고 할 정도로 국내 고고·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최근 남조 유적 답사가 필수적 관행이 됐다. 중국, 일본과 백제의 교류사를 풀기위한 한·중·일 학자들의 학제 공동 연구도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했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적 전범으로까지 격상된 백제의 귀환은 올 한해 문화재학계에서 가장 주목되는 물밑 흐름이다. 하지만, 넘어야할 산이 있다. 백제고고학 전공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동아시아 관점에서 백제의 교류사가 부각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만,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 등을 내세우는 정치적 근거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며 "한·중·일 국민과 학자들사이에 객관적인 역사 탐구라는 공감대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목간 등 유물 잇단 출토
동아시아 교류 허브 입증
일 학자들 답사·행사 활발
'한국의 7세기 목간에 일본인 이름이!'
지난 7월7일 일본 < 아사히신문 > 에는 이런 제목의 특파원발 기사가 실렸다. 국립부여박물관이 백제 고도인 충북 부여 쌍북리에서 10여년전 출토된 백제 목간(나무쪽 문서)을 정리하다 현재 오사카인 '나니와' 지명과 '무라지 공'이라는 일본 고대 성씨가 적힌 물품표를 확인했다는 특종. 일본 역사학계는 경악했다. 한반도 유물에서 처음 확인된 일본인 이름이자, 옛 오사카 부근에 살던 숱한 왜인들이 교역을 위해 백제를 드나들었다는 생생한 물증이 나타난 것이다.
지난 5월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 목간 국제학술세미나에서는 지난해 발견된 '좌관대식기(佐官貸食記)'라는 백제 목간이 소개돼 일본 학자들에게 충격을 던졌다. 이 목간은 흉년 때 농민에게 쌀을 빌려줘 구제하는 백제의 환곡 제도 문서로, 고대 일본에서 발견된 문서 목간과 비교 검토한 결과, 일본 고대의 환곡 제도와 명칭은 물론 나중에 쌀을 되갚는 이율까지도 상당부분 판박이임이 밝혀졌다.
지금 일본 역사학계는 '백제 쇼크'에 휩싸여있다. 지난 2007년 충남 부여 왕흥사터에서 나온 국내 최고(577년)의 사리기와 절터, 잇따라 나온 백제 목간들, 올 2월 전북 익산 미륵사터 서탑 안에서 나온 7세기초 무왕 때의 금동사리기와 명문기 등은 하나 같이 일본 고대 아스카시대의 불교 공예 문화, 정치·사회체제의 원형과 잇닿는 사료들이다. 일본 학계의 시각틀이 통째로 뒤흔들린 건 일본 역사서 < 일본서기 > 등의 백제 영향 기록을 명백히 뒷받침하는, 연대가 확실한 새로운 물증들이 잇따라 백제 유적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일본 최초의 사찰로 꼽는 아스카데라 등 6~7세기 주요 일본 사찰들의 절집 배치 구도, 사리기의 얼개와 묻는 방식 등이 조금 이른 시기 백제 사찰들과 거의 같으며, 목간에 담긴 계량 단위나 행정 문서 내용도 상당부분 백제 것을 본따 만들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중국 남조 문화를 일본이 직접 수입해왔다는 설 등으로 백제를 슬쩍 폄하해온 일본 주류학계의 시선은 이제 180도 바뀌었다고 국내 연구자들은 전한다. 실제로 올초부터 부여, 공주 등의 백제 유적지에는 잇따라 확인된 새 발굴 유적과 유물들을 답사하려는 일본 역사·고고·미술사학자들의 발걸음이 끊일 새 없다. 정림사, 왕흥사 등의 백제 절터, 목간 자료 등을 분석·토론하는 일본 내 학술행사도 전례없이 늘었다. "의자왕과 삼천궁녀에 더이상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한 연구자의 단언처럼 올해 문화재 동네에서 백제는 놀라운 실물 발굴 성과로 부활하면서 고대 동아시아 교류사의 허브로서 입지를 굳혔다.
2007년부터 물꼬를 튼 백제 유산 신드롬이 올해 대세로 굳어진 것은 일본, 중국에서 찾을 수 없는 6~7세기 불교·문화 교류사의 자취들을 고스란히 간직한 유적·유물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요인에 힘입은 바 크다. 이런 맥락에서 최근 주목되는 것이 백제가 문물을 주로 들여온 중국쪽 남조 유적이다. 백제와 동시기 밀접하게 교류했던 난징 등지의 양·진 시대 유적만 해도 그동안 비교할만한 유적, 유물들이 빈약했으나, 2000년대 중반부터 재개발에 따른 발굴이 본격화하면서 백제의 불교, 공예품과 빼어닮은 각종 유물들이 쏟아지고 있다. 최근 옛 도읍인 난징 시내의 홍토교란 곳에서는 부여 정림사터의 소조불과 거의 같은 소조불들이 무더기 발견돼 화제를 낳았다. 주목할 만한 발굴 성과가 잇따르면서 '곳곳에 중국으로 달려가는 구두굽 소리가 요란하다'고 할 정도로 국내 고고·미술사 연구자들 사이에는 최근 남조 유적 답사가 필수적 관행이 됐다. 중국, 일본과 백제의 교류사를 풀기위한 한·중·일 학자들의 학제 공동 연구도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했다.
21세기 동아시아 공동체의 역사적 전범으로까지 격상된 백제의 귀환은 올 한해 문화재학계에서 가장 주목되는 물밑 흐름이다. 하지만, 넘어야할 산이 있다. 백제고고학 전공인 박순발 충남대 교수는 "동아시아 관점에서 백제의 교류사가 부각되는 것은 의미심장하지만, 자칫 국수적 민족주의 등을 내세우는 정치적 근거로 잘못 해석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며 "한·중·일 국민과 학자들사이에 객관적인 역사 탐구라는 공감대를 모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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