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16/2010111601858.html
- 동맹국인 미국에는 왜 작전을 비밀에 부쳤나.

“미국은 눈에 불을 켜고 박정희 대통령이 혹시 사고를 치지 않을까 감시했다. 박 대통령은 원래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국은 처음에 5·16도 반대했다. 5·16 때 난 공군 작전국장이었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 행방불명이어서, 내가 비행기를 띄워 군사혁명 지지 공중시위를 벌였다. 비행기를 띄우니 미군 고문단과 정보국장이 와서 ‘허락 없이 띄웠다’고 난리치더라. 군사원조 물자는 미국의 허락을 받고 띄워야 한다고 하더라.” 


- 보복타격을 가할 경우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이란 우려는 없었나.

“그런 걱정은 늘 했다. 보복에 대한 의구심이 일기도 했다. 그래도 윗선(박 대통령)에서 하명한 것이니까 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경우 누가 덮어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다. 공군 참모총장이냐, 나(공군 작전사령관)냐, 수원 10비행단장이냐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작전계통에서는 내가 총책임자였으니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다면 내가 덮어썼을 것이다.”
 
북한 124군부대에 대한 공군의 보복타격 계획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권 전 사령관은 “한 달 동안 오산 지하벙커에 머물며 ‘고(Go)’ 사인이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끝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고위급 인사들이 청와대를 왔다갔다 하더니 서서히 긴장이 풀렸다”며 “결국 한 일주일쯤 있으니까 공군 참모총장의 얼굴빛이 풀려서, 그때 ‘아, 결국 작전이 취소됐구나’하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권 전 사령관은 124군부대에 대한 보복타격 계획이 취소된 까닭에 대해서는 극도로 말을 아꼈다. 권 전 사령관은 “지금 생각이지만 당시 미국에서 청와대를 도청했던 것 같다”며 “미국 대사관과 청와대가 가깝지 않냐”고 반문했다.



- 미국이 미리 인지했다는 심증은 무엇인가.

“오산 내 방 바로 옆에 미군 314비행사단장이 있었다. 그 친구 이름은 지금 기억이 안 난다. 이상하게 이 친구가 청와대로부터 하명받은 날 아침 6시부터 전화해 ‘모닝 커피를 마시자’ ‘점심을 먹자’ ‘내기 골프를 치자’ ‘영화를 같이 보자’고 밤 12시까지 조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집에도 못가고 있으니까 불쌍해서 위로하려는 것이겠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날 24시간 밀착감시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머리 위에 있었던 셈이다.”


- 124군부대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는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반대 급부가 있었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을 안 때리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국군 현대화’란 반대 급부를 얻어냈다. 공군의 F-4 팬텀 전투기와 육군의 T-1 전차와 해군 잠수함이 들어온 것도 그때다. 당시 미국은 최신예 F-4 팬텀 전폭기를 이스라엘에는 판매하고 있었지만, 우리한테는 절대 팔지 않았다. 결국 우리도 보복계획 이후 F-4 팬텀을 미국으로부터 받아냈다.

사실 1·21사태 전만 해도 우리 군은 북한군한테 어림도 없었다. 북한은 ‘미군만 없으면 한 주먹거리다’라고 생각했다. 당시 북한은 ‘캐터필러(전차바퀴)’까지 생산했지만 우리는 소총도 못 만들었다. 박 대통령은 그게 한(恨)이었다. 박 대통령이 왜 포항제철을 만들었나. 철판이나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 화기를 생산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군현대화를 단행한 직후 우리 군의 전력이 많이 올라갔다.” 


- 북한이 왜 124군부대를 남파했나.

“김일성이 조급하게 판단한 것 같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4·19를 놓친 것을 평생을 후회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4·19 때만 해도 우리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5·16 이후 박정희란 사람이 등장해서 남한을 확실히 장악하자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남한이 단단해지자 124군부대를 보내 박정희 대통령을 테스트하려 한 것이다. 김일성도 124군부대가 청와대 뒷문까지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심검문에 의해 정체가 발각된 북한 124 특수부대원들은 빠른 속도로 북으로 퇴각했다. 권성근 전 사령관은 “우리가 한발 앞서 생각한 그 이상의 초인적 속도로 달아났는데 사람이 아닌 ‘들짐승’ 수준이었다”며 “미군 사령관도 ‘언빌리버블(Unbelievable, 안 믿겨짐)’이란 말을 연발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는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훈련법을 공개했는데 이는 우리군 특수부대의 훈련에도 곧바로 적용됐다.


반면 남쪽은 상황파악이 안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권 전 사령관은 “눈에 안 보이는 적이 가장 무서운 적”이라며 “한밤중에 기어들어오는데 우리는 물론 미군도 전혀 상황파악이 안되는 상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도대체 몇 놈이 들어왔는지, 사단 병력이 넘어왔는지, 전면전 상황인지 아니면 전초전인지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됐다”고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3시간30분 동안 진행된 인터뷰를 끝마치면서 기자는 “박 대통령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박 대통령을 안 것은 5·16 전”이라며 말을 이어갔다.
“대구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 만난 기억이 납니다. 5·16 전만 해도 우리 군대는 정말 형편없었어요. 장군들 배가 나오면 ‘각하, 인격이 나왔습니다’하고 서로 웃던 시절이에요. 장군들은 튀어나온 배에 쌍권총 차고 가죽점퍼 입고 지휘봉 들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당시 박 대통령은 ‘왕따’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말 수도 별로 없었던 사람으로 기억합니다.”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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