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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처럼 나라가 부유해도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



▲ 평등이 답이다…리처드 윌킨슨·케이트 피킷 지음·전재웅 옮김 | 이후 | 448쪽 | 2만1000원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570560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이닥쳤을 때, 미국 뉴올리언스는 아비규환이었다. 사망자가 최소한 1836명, 실종자는 700명이었다. 인명사고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 뉴올리언스에서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룩했던 문명이 사라졌다. 카트리나 이후 수주 동안 약탈, 살인, 방화, 강간, 기아가 이어졌다. 투입된 군대는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호품을 전달하는 대신, 약탈자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21세기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미증유의 자연재해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2008년 중국의 대지진, 2011년 일본의 대지진도 상상하기 어려운 재난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엔 문명, 질서, 신뢰가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일본, 중국과 무엇이 달랐을까. 


미국은 부유한 나라다. 지난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만8000달러로 세계 7위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살기 좋은 사회는 아니라는 점이 카트리나 때 입증됐다. 아울러 세계은행이 발표한 가장 부유한 50여개 국가 중에서 미국은 정신질환 환자, 기대수명, 신생아 1000명당 사망한 유아수, 비만율, 수학과 읽기 평균 점수 등에서 최악의 수치를 보인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연구해온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가 보여주는 소득 불평등에 주목했다. 상위 20%와 하위 20%를 비교해 소득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낸 것이다. 나라 전체가 아무리 부유해도, 그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미국의 소득 격차는 책에서 제시된 23개의 부국 중 싱가포르에 이어 가장 크다. 일본,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4배에 못 미치는 부를 갖고 있는 반면, 미국은 9배다. 즉 불평등이 문제고, 평등이 답이다. 


여전히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지는 않다. 경제성장이 인류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는 시기는 지났다. 저마다 다른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치고 있는 나라들의 기대수명을 비교해보자. 가난한 국가에서는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 기대수명이 빠르게 증가하지만, 중진국 수준에 이르면 증가 속도는 감소한다.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수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 수준에 이르면 수명과 행복의 그래프는 평평해진다. 2만5000달러를 번다고 짧게 사는 것도, 10만달러를 번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유한 국가에서 건강문제와 사회문제는 국가 평균 소득과 관계가 미약하다(그림1). 그러나 소득 불평등은 관계가 있다. 미국이나 포르투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건강과 사회문제는 나빠진다. 일본과 북유럽 나라처럼 평등하면 문제가 좋아진다(그림2). 미국의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가난은 재화의 양이 적다는 뜻이 아니다.… 가난은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다. 가난은 사회적 지위며(…) 계급 간의 불쾌한 구별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난과 불평등 중에 더 나쁜 것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민감할까.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 자부심이라는 방어기제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자부심이란 사실 불안정한 자기도취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가족, 이웃 중심의 안정적인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익명의 사회 속에 내던져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빠른 시간에 남의 시선을 끌고 자의식을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낯선 관계일수록 사회적 지위는 그 사람의 유일한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경쟁도 심해진다. 


불평등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들이 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불평등한 포루투갈에서는 10%만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평등한 스웨덴에서는 66%였다.평등한 노르웨이의 카페에서는 테이블과 의자를 거리에 내놓고 그 위에 손님이 따뜻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담요를 올려놓는다. 고객이나 행인이 담요를 훔쳐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하고 신뢰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는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와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때로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1995년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이 발생했을 때, 신뢰도가 낮고 범죄율이 높은 흑인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높았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두는 것을 두려워했고, 집을 비우기가 겁나 시에서 설치한 냉방 지역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 지역만큼 가난하지만 신뢰도가 높은 히스패닉 거주지에선 사망률이 훨씬 낮았다. 


그리스인의 평균 수입과 1년 건강 관리 비용은 미국인의 절반 정도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태어난 아기의 기대수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보다 1~2년이 길다. 심지어 미국 할렘의 흑인 남성이 65세까지 살 확률은 방글라데시인보다 더 낮았다. 불평등은 낮은 기대수명, 높은 유아 사망률, 작은 키, 저체중 출산, 에이즈, 우울증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불평등하고 사회 신뢰 수준과 통합 정도가 낮은 사회에 사는 젊은 남녀는 평등한 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닥친 난관에 맞선다. 10대 소녀는 임신을 한다. 15~19세 여성 1000명당 출산한 자녀수는 미국이 50여명, 일본과 북유럽 국가들은 10명 미만이다. 사회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단이 없는 10대 여성은 엄마가 됨으로써 성인의 사회관계망에 가입하려 한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전략이다. 배우자나 다른 어떤 사람, 자원에 의지할 수 없으면 일찍 어른이 돼 자녀를 많이 갖는 게 유리하다. 그 아이들 중 최소 몇 명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반면 배우자나 가족이 도와줄 거라고 믿으면 소수의 자녀를 적당한 시기에 가진 뒤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10대 소년은 폭력을 쓴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 행위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참을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피하거나 제거해 이를 정반대 감정인 자신감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박탈당한 남성이 자신의 마지막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평등한 사회에 사는 남자는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좋은 교육, 좋은 직장, 가족,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이런 보호 장치 없이 폭력에 호소한다. 




불평등을 완화하면 가난한 사람들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불평등은 사회 전반에 퍼지는 ‘공해 물질’이다.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일본인보다 4.5년 짧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기 때문이 아니다. 비교적 잘사는 미국 백인들의 사망률도 다른 선진국 사람들보다 높다. 평등한 스웨덴과 불평등한 영국의 직업별 사망률을 비교하면, 비숙련 육체 노동자부터 전문 직업인까지 모든 부문에서 스웨덴이 낮았다. 영국 시인 존 던은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라고 말했다. 불평등은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저자들은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의 근거를 들어 인간에겐 평등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불평등이 보편적이라는 인식이 퍼졌지만, 인간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히려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가 예외라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거울 신경세포는 다른 이의 특정 움직임을 관찰할 때 활동한다. 거울 신경세포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인간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 영화 속에서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을 볼 때 움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생물학적 근원부터 사회적 존재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다. 기업 최고위층에게 과도한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고, 일터로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도덕적 세계의 활은 매우 길지만 이는 결국 정의를 향해 굽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등장하자, 강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은 ‘밀실 평등주의자’가 됐다. 저자들은 “이제는 평등주의자들이 공공 영역으로 돌아올 때”라고 말한다. 


원제인 ‘The Spirit Level’은 건설 현장에서 바닥의 수평도를 측량하는 도구인 수준측량기를 의미한다. 바닥이 기울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이, 불평등 정도가 심하면 사회가 망가진다. 2009년 영국에서 처음 나온 이 책은 당시 보수당 당수이자 현재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과 그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로부터 동시에 추천받았다. 


지금 평등은 좌파의 표어가 아니라 시대정신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건 보이는 만큼 밖에 보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저 것보다 더 큰 이유가 바로 민족의식, 공동체 의식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태생이 다민족 국가일 수 밖에 없는 미국의 한계를 명확히 드러낸 사건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같은 상황에서 처신했던 우리나라 교포들의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그리스 국민의 ‘금 사재기’ vs 한국 '금 모으기'

똑같은 미국에서 똑같은 재해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판이하게 다른 결과가 나왔다는 것은 저 글처럼 단순히 부의 불평등만으로는 그 이유를 말할 수 가 없음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으며, 그 차이를 규명해 본다면 답은 오직 하나 밖에 없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답이 나온 이유는 처음에 언급했듯이 미국이란 나라의 태생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신문화가 빈약하기 짝이 없는 물질문명자본주의의 총본산 미국이기에 민족공동체의식과 가족단위의 문화 및 윤리개념과도 같은 무형적인 이유 때문에 저런 결과가 나왔다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말에도 있듯이 아는만큼 본 것이 바로 저 책이다. 바로 그런 말이다.

그렇다곤 하나 저말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나도 생각지 않는다.
원인이란 항상 복합적으로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수도 꽤 다양하니 만큼 저 책에서 말한 불평등도 꽤 큰 이유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음으로만 치닫는 것도, 양으로만 치닫는 것도 문제될 소지가 많은 것이 항상 중도를 지키고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좋다.
정신문화에만 매진해서 피해를 본 것이 바로 우리 이전 조상들의 나라인 유교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인 것이고, 거꾸로 물질문명에만 매진하여 저런 피해를 보는 것 또한 자본주의의 극치이자 다민족의 천국이라 불리우는 미국인 것이니, 이 들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조화를 이루지 못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저 책은 상당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 우리나라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 위치해 있으며, 슬슬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폐해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그로 인한 각종 문제점들이 여기저기서 속출하고 있고, 반대로 정신문화를 배척하고 물질만능만을 추종하려는 낌새가 사회전반에 퍼져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의 불평등 문제도 하나둘 씩 고개를 쳐들고 있으며, 바늘가는데 실 따라가듯 당연하다는 듯이 부정부패비리가 온갖 곳에서 만연하고 있는 이 때 저런 책이 경종을 울려주고 있으니 상당히 기꺼웁다 하겠다.

많은 이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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