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순 연쇄살인사건에 이어 성범죄자 김길태까지,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혹시 내 주변의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는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도 많다. 사이코패스, 그 실체를 파헤쳐본다.
- ▲ 2009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연쇄살인범 강호순(좌)과 최근 부산 여중생 납치살해 사건 피의자 김길태(우). 조선일보 DB
타인 배려 ‘수퍼 에고’ 영역이 뻥 뚫린 그들
10여 년간 사이코패스 형태의 환자 위주로 정신과 병원을 운영했던 세화정신과 사승언 원장은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살인을 해 정신감정을 받으러 온 적이 있었다. 그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우리 엄마가 속상해할 것 같다'였다. 그들은 피해자와 그 가족이 겪을 고통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쫓아다닌 여성을 2년간 감금하고 강제로 전신에 문신을 했다가 붙잡힌 30대 남자 사이코패스의 경우도 처음 반응은 '자신의 부모 걱정이었다‘고 사승언 원장은 전했다. 이들은 대부분 양심을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수퍼 에고(Super-Ego·정신 내에서 사회가치, 양심, 이상과 관련 있는 영역)' 기능에 구멍이 생긴 것으로 전문의들은 보고 있다.
생리학적으로 타고난 냉혈한(冷血漢)
사이코패스는 생리학적으로도 냉혈한(冷血漢)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정신심리학 연구진 등 다수의 분석에 따르면, 사이코패스에게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겪는 공포 반응이 나타나지 않거나 적게 나온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동물이 죽는 끔찍한 사진을 보여줘도 동공이 커지지 않는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도 손에 땀이 나지 않으며, 롤러코스터를 태워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뱀 인간'이라는 얘기다.
신경의학적으로는 인간의 감성을 관할하는 뇌 앞쪽 전두엽과 중심부 변연계와의 연결 회로에 결함이 생긴 것으로 분석된다. 하지현 건국대병원 정신과교수는 "사이코패스는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기 때문에 강간이나 살인 등 아주 극단적인 행동을 탐닉하게 된다. 상담을 하다 보면 '뱀 같은 놈'이라는 인상을 받는다"고 말했다.
살인범만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뉴스 보도나 영화 등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를 '연쇄살인범'과 연관지어 생각하고 있다. '사이코패스'의 정확한 뜻은 '반(反)사회적 인격 장애의 극단적인 증세를 가진 사람'으로, 꼭 살인을 하지 않더라도 사이코패스일 수 있다. 정신과학계는 성인의 약 1%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갖고 있다고 본다. 이들의 상당수는 범죄와 연관되지 않고 사회에서 암약한다.
사이코 드라마를 통한 정신분석 전문가인 용인정신병원 강남분원 김수동 원장은 "회사나 조직에서 자기 출세나 성공을 위해 남을 무자비하게 짓누르거나 해코지하는 사람들이 그런 케이스"라며 "대형 사기를 쳐놓고도 자기는 호화 생활을 하는 사람도 일종의 사회적 사이코패스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이코패스는 대놓고 남과 싸우거나 갈등 상황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정신 질환으로 인식되어 병원에 오는 경우도 드물다. 김 원장은 "진료를 받더라도 자기만의 생각을 뇌에서 꽉 움켜쥐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정신 치료가 가장 힘든 케이스"라고 말했다.
사이코패스, 어린시절은 어떨까?
사이코패스는 어린 시절부터 '품행장애'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지적이다. 10~12세 이전부터 친구나 자기보다 나이 어린아이들을 자주 때리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태연하다.
방화 수준의 불장난을 할 때도 있다. 쥐를 잡아 직접 죽이거나, 이유 없이 학교에 결석하는 경우도 잦다. 서울대병원 소아정신과와 서울시소아청소년센터가 2005년 서울 시내 초·중·고 학생 2672명을 대상으로 부모 등과 1대1 면접 조사를 통해 분석한 결과, 전체 학생의 1.5%가 사이코패스 징조를 보이는 품행장애 성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붕년 서울대병원 교수는 "그 중에서도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남에 대한 동정심이 없는 돌같이 차가운 '칼로스(callous·돌 같은)' 타입이 나중에 사이코패스가 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기에 품행장애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이처럼 사이코패스 대부분이 선천적인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다 성장과정에서 불우한 환경 속에 놓이면 폭력 성향이 증폭되고 고착화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혼·이산 등으로 가족 해체 현상이 늘어나고, 폭력이 용납되고, 노력하는 과정은 무시되고 '성공 제일주의'가 확산될수록 자기만의 세계에 갇힌 사이코패스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회 안전망 차원에서 품행장애를 보이는 청소년을 조기 발견해 국가가 치료를 지원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며 "사이코패스 범죄자도 성범죄처럼 전자팔찌 등을 채워 감시하는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고 말했다.
사이코패스는 선천적? 후천적?
둘 다 맞다. 블로니겐, 칼슨 연구팀은 "쌍둥이 271쌍을 연구한 결과 인격 형성의 편차에 유전자적 요인이 기여한다는 상당한 증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후 래슨, 리히스타인 연구팀이 1090쌍을 연구한 결과와 비딩, 블레어 연구팀의 3687쌍 연구 결과도 비슷했다. 연구팀은 "사이코패시 핵심적인 특성들은 유전자적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강하다"며 "이들은 냉담하고 비감정적인 특성들이 반사회적 행동과 결합할 때 유전자적인 요인의 기여도가 가장 높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증거들이 성인이 되어 누가 사이코패스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특성을 사회적 환경 속에서 극복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는 뜻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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