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스 월튼 워커(1889~1950)는 1912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패튼이 지휘하던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참전했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그의 부대는 "유령 군단" 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다만 나이에 비해서 진급이 늦었다는 평을 들었으니, 한국전에서 보듯이 맥아더와는 달리 비정치적이었고 기자들이나 외부인사들의 방문을 아주 싫어했던 이유라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 참전했는데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전선 최전방에 맨 앞에 서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대위이던 외아들 샘 워커 역시 한국전에 참전하여 최전방에서 싸웠다.
낙동강전투당시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부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서사모아 제도에 위치한 어느 섬으로 이주시키고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정부가 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군 육참총장에게 영천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대통령과 함께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것을 요청했다는 기절초풍할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
물론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일단 제주도의 대만화는 제주도가 척박한 이유로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일본의 경우는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기에는 반일감정 및 일본 내 좌익 세력의 테러 우려가 있었다는 것인데. 비밀 문서 해제에 따라서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한국군 약 몇 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다는 것이다. 민간인은 서사모아에 정착하고 군인들은 일본 및 유엔과 연합해서 아시아 방위에 이용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 역시 남한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 도 그렇고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이미 남한은 승산이 없다고 보였으니 그럴만도 하다. 실제로 맥아더의 낙동강 시찰도 워커 중장의 낙동강 사수 이후에 이루어졌다.덧붙여 미국 정부 역시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 이 사실은 이글의 맨 마지막 부분의 비문 내용에 다시 나온다.하지만 워커 중장은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 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이 사람이 낙동강전선의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다음과 같다
" 버텨내거나 (그렇게 못하겠으면) 죽어라. (...)
문제는 좁디 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개한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얇은 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전체가 일종의 소방대처럼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돌려막기 전략.. 그나마 북한군의 명장이던 방호산이 마산쪽으로 기습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뻔했다.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그 와중에도 워커 중장은 최전선에서 방어에 힘썼고 남한, 미군 장병들이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다행히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거기다 계획에 없던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 시찰 이후에서야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무훈을 세웠다.
워커 중장은 그 끝장날 상황에서 한국 살려보자고, Stand or die 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 욕 먹어가면서 한국 꼭 지켜야 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상부와 사령관을 설득하고, 한국 장병한테는 내가 죽더라도 한국을 꼭 지켜줄게 라고 하면서 한쪽으론 미군 장병들한테 못 버틸 거 같으면 죽어버려라고 그렇게 소리쳐가면서 한국을 지켜주었다.
하지만 1950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의정부에서 한국사병이 운전하던 군용차에 뒤를 들이받혀 앞 유리창을 깨고 창 밖으로 튀어나가면서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이승만은 이 한국 사병을 포살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워커 가족들의 선처요구와 과실임이 판명되서 무죄로 나왔다.
이 사고 지역이 바로 워커힐이다. 흔히 말하는 워커힐 호텔, 광진구에 있는 그 쉐라톤 워커힐 호텔의 워커힐이 바로 이것. 해외에서는 "쉐라톤 호텔" 들이 종종 보이지만 한국에선 특별하게도 쉐라톤 워커힐 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 하지만,정작 워커를 기리는 기념비 및 동상도 세워졌으나 맥아더와 비교되면서 철저하게 잊혀졌다...아래는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워커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면 워커의 전략은 패튼 전략의 한국화이지만 지나친 전격전 및 기동 전략으로 인해서 부대간 지원에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1950년의 중국군 개입 당시 전선 붕괴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벌어졌다(...) 맥아더 자신은 워커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이 없었고. 그냥 저냥 늙다리이자 버거운 부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워커의 공이 잊혀진 것도 사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워커가 순직하지 않았다면 맥아더에 의해서 해임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지로 워커 사후 워커의 막료들중 상당수가 리지웨이에 의해서 전출되는 일이 벌어졌다.쇼맨십이 특기인 맥아더나 어느 정도 기자들에 대해서 온화한 리지웨이에 비해서 딱딱거리는 편이 많아서 기자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마거릿 히긴스의 회고담에서도 은근히 돌려서 깔 정도. 사실 워커의 공이 이런 이유로 묻힌 것도 있다.
출처: 엔하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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