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내성적이고 약간은 왕따기질이 있던 '권강한' 이라는 이름의 한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차원이동 판타지 소설이다.
거의 10년 전 소설이지만, 지금봐도 꽤 괜찮을 정도로 나름 인지도를 얻었던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주인공 권강한은 이성적이긴 하나 감정적으로는 약간 메마르고 어딘가 망가진 성향의 인물이다.
염세주의자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삐딱하다고나 할까.. 아마도 현시창같은 가정생활, 학교생활 때문에 가족에 대한 정이고 기대고 다 사라졌다는 설정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충동적인 면이 있다. 순간순간 기분에 따라 그냥 저질러 버리는 성격이란 소리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한번 빡이 돌면 칼을 들고 여기저기 막 쑤시는 짓도 서슴치 않는다. 마치 에반게리온의 신지가 제어불능의 미치광이가 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다. 한마디로 소심한 녀석이 가끔씩 미쳐버린다고나 할까..
툭하면 '죽여버린다' '태워버린다' '날려버린다' '박살내버린다' 와 같은 소릴 입에 달고 사는데, 이게 말뿐인 건지 아니면 진짜 그렇게 저질러 버리겠다는 건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성격이 모가 나있다.
하기사 요즘 중고생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면 단번에 이해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소설 속 주인공인데 그러면 안되지..

대인관계도 좀 연구대상이다.
자신이 좌지우지할 수 있고 영향력이 미치는 부류에게는 나름 편안하게 대하지만, 그렇지 않고 부담스러운 상대에게는 이쪽에서 거리를 둬 버리거나 아예 벽을 쳐버린다. 마치 거절당할까 두려워 아예 시도조차 하지않는 듯한 느낌이다.
가까이 오길 바라면서 막상 가까이 오면 물러서는, 계속 소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는 일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며, 가까운 사람은 가깝고 편하다고 막 대하고, 관계없는 사람은 나완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또 막대하는..좋게 말하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엔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자신이 싫어하거나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까칠한 면모를 보여주는 참으로 이기주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상이라 할 수 있으며, 제법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고 사랑해 주는 게 신기하다 여겨질 정도로 나쁘게 말하면 그냥 왕따를 자처하는 유형이다.

물론 책에서는 주인공 '권강한'의 이러한 성격에 대해 나름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신력과 마력을 함께 다루고, 초끈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력은 절대 정상인은 가질 수 없는 능력이다. 적어도 정신분열, 이중인격 같은 미치광이에 가까운 정신상태를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데, 마침 주인공의 자라온 환경때문에 주인공은 약간의 정신이상 증세를 가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주인공의 능력을 보유할 수 있게 되어 결국 차원의 붕괴를 막은 것이 아니겠느냐' 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고 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완벽한 논리라고 해서 감정적으로 생기는 불만을 쉽게 다스릴 순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거지.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런 사이코 기질의 미치광이 성격이 3부에서는 상당히 순화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말이 나올 때마다 받아치는 속마음은 코믹함을 넘어 개그수준까지 진화한다.
한마디로 거슬림은 상당히 사라지고, 좋은 점은 엄청나게 늘었다는 거지.
뭐..여전히 속으로야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험한 말을 늘어놓곤 있지만, 실제로 감당 못하게 폭주한다거나 하지도 않고, 나름 인내심이나 냉철함도 많이 늘었고, 또 무엇보다 자신감이랄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쉽게 쉽게 풀어나갈려는 성향이 엄청나게 강해져 거의 숙달된 조교라고 느껴질 정도의 완숙미도 생겼다.
만약 작가가 최초 1부를 쓸 때부터 이러한 인물변화를 염두에 두고 써온 것이라면 정말 끝내주는 기획 능력자라 아니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성숙함이 엿보이는 그런 작품이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보는 사람들은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나뉘곤 한다.
싫어하는 쪽은 주인공이 싸가지 없다거나 시점과 문체가 너무 가볍고 날림에다 주인공이 혼자 머리 굴리다 낄낄대며 중얼거리는 별 미치광이 같은 짓을 옆에서 쭉 지켜봐야 하는 느낌이라 싫다는 쪽이고, 좋아하는 쪽은 당시로서는 생각지 못한 특이한 개념과 설정이 '개성있다', '기발하다', 또는 작가 자신도 꽤 생각을 많이 한 듯한 깊이있는 대화 및 그 속에 담겨있는 개념과 철학 등이 중간중간 주인공을 통해 흘러나오기 때문에 그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읽어나가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며 좋게 바라보는 경우이다.

물론 나는 이 중 후자에 속했다.
지금 같으면 이렇게까지 좋아할 수 있었을 진 감히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선악과 역지사지 개념에 예민하지 않았던 때였기에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크게 와 닿았었다.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이 책을 처음 읽고서 주인공의 기발한 설정과 개념과 나름 깊이 고민한 듯해 보이는 깨달음에 대해 상당히 감탄했었기에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소설에 감탄했고, 또 장점이라 생각하는 몇가지를 꼽아보면 우선 마법에 실제 과학을 접목시켜 리얼리티를 살렸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중,후반부에 나오는 다중우주나 초끈이론도 그 중 하나지만, 예를 들어 자신의 근시를 고치기 위해 눈의 구조를 해명한다거나 하반신 마비나 불임을 해결하기 위해 인체구조를 투시하고 조작하는 등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결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 주었고, 그만큼 실감나게 만들어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이 비록 실감할 수 없는 상상 속의 이미지라곤 하나, 우리가 학창시절에 배워 어느 정도 원리를 깨닫고 있는 과학이라는 요소를 대입하여 큰 틀인 마법을 설명한다거나 또는 반대로 과학이 밝혀낸 자연현상의 법칙들을 토대로 마법력을 행사하는 등 '과학'이라는 실체에 '마법'이라는 가상 이미지를 접목시켜 독자의 이해를 도모하는 식의 묘사 덕분에 읽는 나로 하여금 이해도 난항에 의한 몰입도 저하를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반대로 상당한 관심과 재미를 유발시켜 주더란 말이지.
그래서,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상상하며 읽는데에도 상당히 편했던 기억이 난다.


다음으로 또 마음에 든 것은 글쓴이의 철학이었다.
1부부터 3부까지 가는 동안 주인공은 상당히 대화를 많이 한다.
동료들과도 많이 대화하지만, 희한하게 적들과도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대화 속에 묻어나오는 글쓴이의 생각이나 개념, 철학 등이 상당히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드는 생각들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작가가 평소 어떤 주제에 대해 궁리해 왔고, 또 고민해 왔었는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만큼 상당히 가치있는 생각들이 주인공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더란 거다.
이런 싸구려 같지않은 진지한 고찰이 또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었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면 '변화가 없으면 발전도 없고- 나중에 외전 '매직 크리에이터' 에서 주인공 레지와 제룬버드와의 대화에서도 다시 언급된다. -시련이 없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라든가, '낮에 볼 때는 하늘색이지만, 밤에 볼 때는 희색이라면 그것은 하늘색인가 흰색인가?'와 같은 생각들..
게다가 2부에서 플라톤의 화신인 교장이 류드나르(권강한)에게 묻는 질의응답을 통해 이 책을 쓴 작가가 평소 어떤 생각을 해왔고, 무엇을 믿고 있으며, 현재 어떤 개념을 가지고 있는가를 단박에 알아챌 수 있을정도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투영해 놓았는데, 이게 진짜 대박이었다. 

참고로 적어보면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가?
2.. 인간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3.. 행복이란 무엇인가?
4.. 낙원은 존재하는가? 

이게 어디 그냥 편하게 시간이나 죽일려고 읽는 킬링타임용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화두냔 말이지..ㅋ


그리고, 마법설정도 마음에 들었다.
이 사이케델리아는 판타지 세계답게 마법을 구사한다.
그런데, 이 마법이 각기 다 다르다.
마나의 성질도 다르고, 그 마나를 통해 발현되는 마법의 체계도 다르다.

예를 들면 이렇다.
1부 환상대륙의 마나는 바다 속에 잠겨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마나이다.
마법사는 이 마나를 피부호흡하듯 몸 안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모은 마나를 심장에 쌓는 방식으로 마나축적이 이루어진다.
마나는 항상 고르게 분포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에 아무리 몸에 쌓아도 지속적으로 빠져나가 버리지만, 마나를 일정량 모으게 되면 그 자체로 안정화 상태를 이루는데, 이 경계를 클래스라고 부른다.
마나축적은 신체 각 부위별로 축적시킬 수 있으며, 총 클래스는 8클래스까지이다.

2부 혼합세계의 마나는 순환하는 대기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마나이다.
따라서, 마법사는 이 마나를 정신력으로 자신의 몸 주위로 끌어모은 다음, 태양이 지구를 공전시키듯 끊임없이 자신의 몸 주위를 돌게 만드는데, 이 것을 가리켜 '마나회전'이라 부른다.
이 '마나회전'은 1부의 '마나축적'에 해당하는 개념이며, 1부의 '클래스'처럼 안정화된 마나회전을 가리켜 '서클'이라 부른다. 
마법을 사용할 땐 뇌파에 의해 마나회전이 일시 정지하며 마법이 발현되는데, 이 때 파장이 뿜어져 나오며 이 파장을 일컫어 '마나파장'이라 부른다.
총 서클은 11서클도 가능한 것 같지만, 실제는 10서클이 한계인 것처럼 보인다.

3부 다중세계의 마나는 허공에 펼쳐진 전자기판의 회로 or 거미줄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이 것을 가리켜 '마나회로' 라 부르고, 마법사는 이 '마나회로'를 정신력으로 반응시켜 복사한 다음, 문신을 새기듯 자신의 몸에 깔아서 이 둘을 접속시키는 방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몸에 회로를 구축하는 것을 '서킷'이라 부른다.
마법을 사용할 때는 정신력으로 이미지를 구상하면 관자놀이로 부터 이어진 피부의 '서킷' 에서 마나장이 형성되어 허공의 마나회로와 반응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마법이 발현된다.
때문에 유일하게 이 세계의 마법은 마나소모 라는 개념이 없으며, 속도도 이미지를 떠올림과 동시에 발현되기 때문에 엄청나게 빠르지만, 대신 정신력의 소모가 훨씬 큰 것이 단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이제까지 막연히, 그러면서도 의심치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라해 왔었던 마나와 마법의 이미지를 그대로 쫓지않고, 각기 특성을 부여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 냈다는 점이.. 뿐만 아니라, 그 생각이 참으로 절묘하면서도 기발한 것이 전혀 허술하다거나 어색하지 않고 참으로 참신하다 싶었던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었다.
한마디로 아이디어 설정 면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완벽성이 엿보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었던 건 정령에게 캐릭터성을 부여했다는 점이었다.
개성을 부여하고 성장시켰으며, 동료로 받아들여 팀웍을 이루게 했다.
또, 역활분담을 통해 협동적인 전투를 가능하게 한 점이나 다른 세계에서 인간으로 화하게 하거나 소멸했던 정령을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는 등의 드라마틱한 이야기 부분- 이 정령의 숲의 재회는 정말 감동적이었지 -도 상당히 좋았다.
싸울아비 룬이나 달빛 조각사, 아크, 엘란처럼 정령이나 소환수 같은 존재들에게 캐릭터성을 부여해 함께 움직이는 류의 소설이 요즘에는 제법 눈에 띄이곤 하지만, 저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그런 소설은 거의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정령들과 알콩달콩 티격태격 감정을 공유하며 함께 싸워나간다는 설정이 크게 와닿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도 저런 동료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와 같은 부러움 비슷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처럼 비록 초반 1부에서 보이는 장난치는 듯한 작명센스나 배경설정, 또 캐릭터의 험악함이나 문체에서 풍기는 느낌들은 가볍기 그지 없으나, 실제 내용면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포장보단 알맹이가 훨씬 좋았던 책이 바로 이 '사이케델리아' 라는 책이었다.
덕분에 난 읽는 도중에도 연신 '호오 호오' 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고, 한 순간도 책에서 눈을 떼지못할 정도로 책 속에 깊이 빠졌었으며, 마지막 3부까지 다 읽어나가는 동안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곤 단 한번도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을 만큼 흡입력도 좋았었다고 기억한다.
때문에 4부 무림 편도 나왔다고 들었을 땐 굉장히 기대를 많이 했었었지만, 아쉽게도 4부는 그런 나의 기대에 상당히 못 미쳤던 관계로 그 높았던 기대치만큼이나 실망도 많이 한 비교체험 극과 극의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 보고 난 다음의 느낌을 한마디로 정의내린다면 1부는 좀 그저 그렇고, 2부는 흥미로우며, 3부는 재밌다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봤을 땐 이제껏 내가 이제까지 읽었던 몇 안되는 판타지 소설 중에 당당히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의 괜찮은 소설이라 말할 수 있겠다. 

아무튼 그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소설, 사이케 델리아는 총 3부 12권으로- 1부 4권은 '환상대륙 탐험기' 2부 4권은 '혼합 세계 탐험' 3부 4권은 '다중 세계 탐험', 4부는 '무림편'은 미완으로 흐지부지 중단되었기에 따로 언급치 않는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각 부별로 좀더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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