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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도 기억 못하는 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대 66인 중 생존 11인
日서 옥고 치르고 돌아오자 정부는 약속 저버리고 "자! 차비 1만원"

12월의 바다는 추웠다. 떨리는 몸을 추스릴 여유도 없이 배는 마구 요동을 쳤다. 바다를 건너기에는 너무 작은 배였다. 7톤이라고 했던가? 그나마 폐선 직전의 허름한 배였다.

배가 파도에 밀려 치솟았다가 떨어질 때마다 머리가 흔들리고 구역질이 났다. 벌써 몇 번이나 토했는지 모른다. 더는 토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도 내장은 자꾸 쓴 물을 목구멍으로 올려 보냈다.

밀항이었다.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몇 시간이, 아니 며칠이 지난 듯한 악몽의 시간이 지났을 때 갑판에서 하선 신호가 왔다. 도둑고양이처럼 밟은 뭍은 일본 땅이었다. 구레(吳)항의 한 구석. ‘아!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뒤틀어진 삶의 시작인 것을 그 때는 몰랐다.

66명이 일본으로 떠났다. 12명은 배의 침몰로 바다 밑에 젊은 육신을 누였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행방불명이 19명. 돌아온 45명 중 이제 남은 이들은 11명이다. 세월의 흔적이 머리며 얼굴에 하얗게 내려앉았다. 견디기 힘들었던 50년 세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세상에 바랄 것은 없다. 단 하나, 오래도록 간직한 아픔 하나만 풀어달라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바쳤던 젊음을 제발 아는 척이라도 해달라’고.

1959년으로 시계바늘을 되돌리자. 그해 12월 14일 일본 니가타(新潟)항구에는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재일한국인들의 첫 북송선이 출항하는 날이었다. 1945년 8.15 해방 무렵 200여만 명에 달하던 재일 동포들 중 140여만 명은 해방 직후 대부분 귀국했다. 하지만 나머지 60여 만 명은 타의 혹은 자의에 의해 귀국하지 못한 채 일본에 잔류해 있었다.

1959년 4월 13일 제네바에서 재일한인 북송에 대한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간 회담이 열렸다. 한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도 그해 8월 11일 일본과 북한은 인도 캘커타에서 ‘북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간의 재일조선공민들의 귀국에 관한 협정(일명 캘커타 협정)’에 정식 조인한다. 그래서 이뤄진 것이 1959년 12월 14일의 첫 북송선 출발. 이승만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해군을 경계 태세로 전환시키기도 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알려진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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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윤씨 ⓒ 뉴데일리

하지만 재일동포 북송 저지를 위한 움직임은 이승만 정부의 깊숙한 내부에서 발 빠르게 추진되고 있었다.

1959년 9월 초 내무부 치안국은 경찰간부시험 합격자 24명과 재일학도의용대 출신 41명, 예비역 장교 1명 등 66명을 재일동포북송저지 공작원으로 선발한다. 김홍윤 씨도 그 66명 중 하나였다.

“경찰관 시험 합격자 출신이 저를 포함해 모두 24명이었습니다. 1959년 봄 경찰간부시험에 응시하고 합격통지를 기다리고 있는데 9월 2일 아침까지 서울 을지로 3가 황금여관으로 출석하라는 통지를 받았어요.”

황금여관에 도착하니 을지로 4가 부근의 ‘시청각교육소 간판’이 붙은 2층 적산가옥으로 안내했다. 일본어 구사 능력 등을 묻는 면접을 치루자 학도의용군 출신 41명과 함께 우이동 신원사 근처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3개 소대로 나뉘어 공작원 교육이 시작됐다. 안착신호 방법, 일본어와 정세파악 교육, 일본경찰에 들키지 않도록 신분을 잘 숨기는 법 등을 가르쳤다. 개인의 선택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복종만이 가능했다. 나중에 들은 자신들의 임무는 레포(비밀세포망원), 고베지구 조총련 간부 납치, 조총련에 가입해 일본적십자사의 북송 추진 업무를 저지하는 등의 역할이었다.

두 달 조금 넘게 교육을 받고 10여 명씩 조를 나눠 각기 마산으로 향했다. 국교수립이 안된 일본에 잠입하려면 밀항을 해야 했다. “당시 저희를 교육시킨 사람이 박종철 사건으로 옷을 벗은 박처원 치안감입니다. 당시 계급이 경위였는데 마산에서 승선을 할 때 전송을 나와 눈물을 흘리더군요.” 김홍윤 씨에겐 그날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되어 있었다.

잠입은 모두 7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1차로 1959년 11월 1일 제1조가 부산에서 밀선에 승선하여 11월 3일 히로시마현 오미치항에 도착했다. 2차는 11월 10일 감포항에서 무역선 제21 칠대양호에 승선하여 12일 후쿠오카현 오쿠라항에 도착, 3차는 11월 29일 부산항에서 무역선 제3 대영호에 승선하여 고베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3진은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2명만 상륙했고 10명은 선박에 머물다가 이듬해 강제송환된다.

김씨는 12월 12일 제5조로 마산항에서 선명미상 선박에 승선, 14일 구레항에 도착했다. 12월 13일 출발한 제6조 12명은 거제를 출발하는 수송선 명성호에 승선했다가 큐슈 근해에서 조난당해 승무원과 함께 전원이 숨졌다.

30시간의 항해를 마치고 구레 항에 도착한 김씨의 조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배 밑창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 “선원증을 만들어 주기에 가지고 다녔지만 가짜 선원증이니 일본 영해에서는 통하지 않았습니다다” 김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구레 역으로 가서 도쿄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원들과도 뿔뿔이 흩어졌다.

도쿄에 도착하니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구체적인 임무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 도착했는데 공작과 관련한 아무런 지시도 없는 거예요.” 게다가 공작금의 송금도 없어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출발 당시 받은 3만 엔의 공작비는 한두 달이 지나니 떨어졌다. 안가도 없었고 접촉 라인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동료는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서 지내기도 하고 취업을 한 경우도 있었어요. 우선 생계조차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정부에서는 아무런 지원이 없는 겁니다.”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하며 나름대로 북송 저지공작을 하고 있는데 1960년 4.19로 정권이 교체됐다. 그 다음부터는 간간히 오던 연락도 한동안 끊어졌다. “모두들 신변 걱정을 하고 있는데 5월 초 국제방송을 통해 철수하라는 명령이 왔어요.” 귀환선이 기다린다는 시모노세키로 갔다.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승선해 배 밑의 선실에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배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라이트가 비춰졌다. “나와라.”

문을 여니 중무장한 일본 경찰들이 배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길로 체포되어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됐다. 출입국관리법 위반으로 대부분 징역 6~8월을 선고받았다. 한국대표부에 도움을 청했지만 철창으로 싸늘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승만 정부가 한 일이니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시모노세키에서 붙잡힌 25명은 1961년 복역을 마치고 강제송환 당했다. “1961년 6월 중순께 부산을 통해 돌아왔는데 경찰 관계자가 영도경찰서 수상검문소로 데려가더군요. 공작보고서를 쓰라고 해서 썼더니 교통비조로 몇 만 원을 주면서 ‘집에 기다리면 경찰 임용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김씨는 “하지만 그 연락은 끝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계가 막막했다. 간부 임용 약속을 철저히 잊혀졌고 일본 경찰에게 당한 고문으로 취업조차 여의치 않은 대원도 있었다. 대부분의 삶이 팍팍하기만 했다. “공부 잘하는 아들 셋을 모두 실업계에 보내야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부모의 그 아픈 마음 헤아릴 수 있어요?” 그 공부 잘하는 아들들도 이제 장년에 접어들었다.

한 대원의 딸은 이렇게 말했다, “국가의 명령으로 일본에 갔다가 고생 끝에 한쪽 다리에 장애를 입은 상태로 돌아오셨어요. 그 때문에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하여 평생 단칸방 신세를 면치 못하셨습니다.” 국가가 한 개인의 소중한 삶을 이렇게 망쳐도 되는 것인가? 더구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대원의 경우는 더 눈물겹다.

“취직을 한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나간 남편의 생사를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여 아직 그 호적을 말소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세 살이었던 딸을 홀로 키우며 평생 모진 풍파를 겪어야 했다어요.” 그 부인은 “지금도 단칸방에서 살고 딸은 홀어머니 밑에서 교육의 기회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등 아버지 없는 서러운 세월을 살아왔다”고 눈물지었다.

재일교포 북송저지단원 중 12명이 조난사고로 숨졌다는 사실을 폭로한 조선일보 1960년 12월 17자 3면.

이들에 대한 기록은 곳곳에 보인다. 조선일보 1960년 5월 13일자 1면과 동아일보 1960년 7월 7일자 1면은 이들 일부가 일본에서 체포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또 조선일보 1960년 12월 17자 3면엔 12명이 조난사고로 숨졌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인지대도 없어 이들은 국가를 상대로 제대로 된 손해배상 소송도 하지 못한다. 최근 심대평 무소속 의원 등이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들의 가슴의 응어리는 풀리지 않는다. “평생 고생시킨 마누라며 자식들에게 남편이, 아버지가 나라를 위한 일을 했다는 것을 국가에서 인정해주는 것이 저희 소원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국가나 개인이나 숨기고 싶은 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들 66명을 우리는 너무 차갑게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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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국민을 방치하는 국가에 애국심은 생기지 않는 법이다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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