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예전 책장에서 책을 꺼내 하나하나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오늘은 그 중 은하영웅전설(이하 은영전)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고 넘어갈련다.
은영전에는 수 많은 등장인물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동맹의 얀 웬리 이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로써, 과거의 사실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줄 아는 알고, 인간의 심리에도 도통한 지장이다.
제국군의 카리스마 영웅 라인하르트와는 180도 다른 유형이라 보면 되며, 호머의 일리아드 오딧세이의 캐릭터와 비교하면 얀 웬리는 오딧세우스, 라인하르트는 아킬레스와 비견할 수 있겠다.
라인하르트의 화려한 불꽃도 좋지만, 내 성향에는 얀 웬리처럼 유유히 흐르는 강이 더 맞는 듯 하다.
10년 전에 읽었을 때나 10년 후에 읽었을 때나 여전히 얀 웬리를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뭐.. 감상은 이 정도로 그치고,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다름이 아니라 이 은영전 속에는 꽤나 괜찮은 구절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짧은 문장도 있고, 긴 구문도 있다.
예전에는 이런 부분들을 그냥 저냥 감탄하며 넘기기에만 바빴는데, 다시 찾아볼려 했더니 10권이나 되는 책 어디 어느 부분에 적혀있었는지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더란 말이지..
그게 좀 안타까웠었는데, 마침 다시 읽어볼 생각이 들었으니 이 참에 그런 괜찮은 부분들을 여기에 기술해 두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읽기 시작한 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 그때그때 올리기로 결심하고 일단 스타트부터 끊을 요량으로 여기에 언급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단은 대충 올려놓고, 10편까지 다 읽고 나면 그 때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다..
뾰족한 아래턱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센코프도 동의를 했다
"견고한 요새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방심하기 십상이죠. 성공의 가능성은
큽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제가 떠도는 소문 그대로 일곱번째의 배신자가 된다면 이 작전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갑작스런 생각이라서......"
양의 진지한 표정을 보고 센코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처하실 겁니다. 그러나 난처한 것으로 끝나서야 어디 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대책을 세우셔야죠."
"생각은 하고 있소만......"
"어떻게......"
"결론은 하나입니다. 귀관이 배신하면 그것으로 나는 손을 들 수밖에
없소. 그밖에 어쩔 수가 없지 않소?"
베레모가 양의 손에서 떨어졌다. 구제국군이 허리를 굽혀 줍더니, 묻지도
않은 먼지를 턴 다음 상관에게 넘겨 주었다.
"그땐 나는 파멸이오. 그러나 이번 일에 있어 나는 파멸을 감수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저를 완전히 믿는다는 말이 되는데...... 정말 저를
믿습니까?"
"그 길밖에 없지 않소. 귀관을 믿지 않았다면 이 계획은 애당초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신용하니까 세웠지...... 귀관을 믿는다는 대전제하에 이
계획은 수립된 것이오."
"그렇겠군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센코프의 표정은 전적으로 납득이 간 얼굴이
아니었다. '장미의 기사' 연대 지휘관은 절반은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 또
절반쯤은 자성하는 눈빛으로 다시 상관을 쳐다보았다.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사령관 각하!"
"......"
"이번에 사령관 각하에게 부과된 명령은 정말 무리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절름발이 함대, 그것도 오합지졸에 불과한 약졸들을 이끌고
이젤론 요새를 함락하라니 전혀 말이 안 됩니다. 이 명령을 각하께서
거부했다 해도 각하에게 책임을 물을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 각하께서 순순히 응한 것은 기술적인 면에서 실행할 자신이
있으셨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보다 좀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줄
압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명예욕입니까? 아니면
출세욕입니까?"
센코프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출세욕은 아닌 것 같은데."
양의 대답은 담담했다. 듣기에 따라선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30세 전에 각하 소릴 들었으니 명예나 출세는 이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소. 솔직히 털어놓소만, 나는 이 작전이 끝난 뒤 다행히 목숨이 붙어
있다면 퇴역할 생각이오."
"퇴역이라고요?"
"그렇소. 연금도 붙고 퇴직금도 나올 게고...... 혼자 몸 살아나가는 데엔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좀더 자유스럽게 지내고 싶소."
"이런 정세하에서 감히 그런 말씀을 하시다뇨!"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듯한 센코프의 음성이 오히려 양에겐 우습게 들렸다.
대령답지 않은 순수한 점이 과히 싫지 않았다.
"바로 그 정세란 것에 대해서 말하자면, 아군이 이젤론을 점령하면
제국군은 침공 루트를 거의 잃고 맙니다. 동맹 쪽에 역침공을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취하지 않는 한, 양군은 충돌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적어도
대규모적으로는 말입니다."
"......"
"그래서, ...... 이건 동맹군 정부의 외교 수완에 따라 다르겠지만,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으므로, 그것을 잘 이용하면 제국과 뭔가
서로 만족할 수 있는 평화조약을 맺을 수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안심하고 퇴역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이 항구적인 평화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글쎄요. 항구적인 평화라는 건 인류 역사상 없었던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거니와 기대를 걸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몇십 년 동안 평화가 유지된 예는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다음 세대에 무언가 유산을 남겨 줘야 한다면, 역시
평화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 세대가 물려준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각각의 세대가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장기간의 평화가 유지되지 않을까요? 그것을
잊어버리면 선대의 유산은 다 털리고 인류는 처음부터 재출발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긴 그것도 괜찮긴 합니다만......"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군용 베레모를 양은 가볍게 머리 위에 얹었다.
"요컨대 나의 희망이 고자해야 앞으로 몇십 년밖에 안되는 것일지라도 그
평화는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집엔 열네 살짜리 소년이
있습니다. 나는 그 아이가 전쟁에 끌려나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양이 입을 닫자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후에,
"실례입니다만 사령관 각하, 각하는 대단할 만큼 정직한 분이거나 아니면
루돌프 대제 이래의 궤변가이실 겁니다."
하고 센코프 대령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기대 이상의 답변을 얻은 것 같습니다.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영원한 평화는 없다지만 그 영원한 평화를 위해서 말입니다."
- 얀과 센코프의 대화 중 일부 -
너무도 무모한 원정을 강행한 정부와 군부는 유족과 반전파들로부터
격렬한 비난과 탄핵을 받았다. 비열한 선거 전략과 참모의 히스테리적인
출세욕으로 말미암아 남편과 아들을 잃은 시민들의 분노는 날이 갈수록
증폭될 뿐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명이나 금전을 많이 낭비했다고 하지만 그 이상으로 존중해야 할 일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이런 때일수록 감정적인 반전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이처럼 주전론자들 가운데에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자도 있었다.
"금전은 그렇다치더라도 인명 이상으로 존중돼야 할 것은 무엇인가?
권력자의 몸보신인가, 군인의 야심인가? 2,000만도 더되는 장병들의 숭고한
피를 헛되게 함으로써 그 몇 배나 되는 유족들을 울리고서도 그 이상으로
존중할 게 있다니 그것이 무엇인지 밝혀라."
시민들이 불같이 노호하여 아우성치면 대부분의 주전론자들은 얼굴을 붉힌
채 어디론가 숨어 버렸다.
- 은영전 2권 암리츠아 회전 중 일부 -
행성 페잔의 자치령주 집무실에서는 보좌관 루팟 케셀링크가 아드리언
루빈스키에게 여러 가지 보고를 하고 있었다. 먼저 제국에서 가이에스부르크
요새의 와프 실험이 성공했음을 전하고 이어 자유행성동맹의 동향에 대해
보고했다.
"자유행성동맹 정부는 양 웬리 장군을 수도로 소환하여 사문회에
회부하기로 결정했다 합니다."
"사문회라고? 그건 군법회의와는 다른 것 아닌가?"
"그렇습니다. 군법회의라면 먼저 정식 고발이 있어야 됩니다. 피고에게
변호사도 붙여야 하고 공식기록도 남겨야 합니다. 그러나 사문회라는 것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의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의혹과 억측을 토대로 정신적인 압박을 가하는 데엔
제법 효과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동맹 권력자들에게 어울리는 짓들이군. 입으론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 사실은 법률이나 규칙을 무시하여 공동화시키고 있으니까.
하여튼 고식적이고 위험한 방식으로 정치를 하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구먼.
권력자 스스로가 법을 짓밟으니 사회 전체의 규범이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로군. 말기증상이야, 말기증상......"
"그야 그들 자신이 해결할 문제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걱정할 건 아닌
줄 압니다."
루팟 케셀링크는 그렇게 말하곤 신랄한 어조로 덧붙였다.
"능력도 없이 분에 넘치는 유산을 물려받은 자는 그에 걸맞는 시련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걸 견뎌내지 못하면 망하는 건 당연한 일, 그건 꼭 골덴바움
왕조에만 국한되는 얘기는 아닙니다."
자치령주 루빈스키는 그에 대해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테이블 표면을
손톱으로 긁고만 있었다.
- 루빈스키와 루팟의 대화 중 일부 -
며칠 동안의 실랑이 끝에 하루는, 귀가하려고 그 건물을
빠져나오던 베이 준장을 붙잡을 수 있었다. 프레데리커는 딴청을 부리는
그의 태도에 벌컥 화를 내면서, 이런 식으로 책임회피를 계속한다면 언론에
고소하겠다고 위협을 가했다. 하지만 베이 준장의 반응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보시오. 아마 어느 신문이나 방송도 그 사실을
기사화하지는 않을 거요. 무시당하거나 냉소를 받는 게 고작일 거요."
프레데리커의 눈동자가 상대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것은 분노, 처절한
분노의 시선이었다. 맞받아치는 베이 준장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은
잠시였다. 가벼운 후회와 낭패의 빛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해서는 안 될 말을 경솔하게 입 밖에 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프레데리커의 마음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에드워즈 위원회 사건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트류니히트 정권은 언론에 대한 지배력과 통제력까지
손아귀에 쥐고 있는 게 사실인 것 같았다. 정치권력과 언론이 결탁하면
민주주의는 비판과 자정(自淨) 능력을 잃게 되고 죽음의 병을 앓기
시작한다. 그런 위기가 지금 이 나라에 퍼져가고 있는 중이었다.
- 프레데리커와 베이의 대화 중 일부 -
"전쟁을 이용하여, 즉 타인의 희생을 빌려 자기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매력적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있지도 않은 조국애를 내세워
남을 기만하는 사람들에게도 전쟁이란 아름다운 것이겠죠."
목소리는 낮았으나 그의 말 속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참고 견디다 못한
양이 빈정대는 투로 한 마디 던진 것이었다. 순간 올리베일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종횡무진 늘어놓던 변설이 허를 찔렸기 때문이다.
"귀, 귀관은 우리들의 조국애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거요?"
"당신들이 성경 구절처럼 외워대는 조국의 방위나 국가의 존립을 위해
불가불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타인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기 전에
스스로 전선에 나가 모범을 보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몸소 총대를 잡고
말입니다."
"뭐라구요?"
"예를 들자면 주전파의 정치가, 공무원, 문화인, 재계인사 들로
'애국함대'라도 하나 만들어 은하제국군을 향해 앞장서서 돌진하는 게
어떻습니까? 안전한 수도 하이네센에서 최전선인 이젤론 요새로 온 가족을
데리고 이사하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습니다. 땅과 집은 제가 충분히
제공하겠습니다."
그 동안의 침묵은 도전의 준비기간이었던 모양으로, 감추어졌던 적의가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당황했다. 일방통행의 사문회에 양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고 나선 것이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 무엇이 가장 비열하고 치졸한가를 먼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 권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은 안전한
장소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전쟁을 찬양하고 타인들에게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을 강요하여 전장으로 밀어넣는 것이 바로 그런 짓이 아닐까요?
진정 우주의 평화를 원한다면 은하제국과 무익한 싸움을 하기보다는, 먼저
우리 몸속에 서식하고 있는 악질적인 기생충부터 제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얀과 올리베일러의 대화 중 일부 -
국방위원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양 장군, 긴급사태가 일어났소. 이젤론 요새가 제국군의 전면 공격을
받고 있소이다. 즉각 구원에 나서 줘야겠소."
"제가 말입니까?"
10초쯤 침묵이 흐른 뒤에, 양은 여유만만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반문했다. 네그로폰티는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 스스로를
고무하려는 듯 목소리에 억지로 힘을 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않소. 귀관은 이젤론 요새와 주둔함대 사령관을 겸임하고
있으니까...... 적의 침략을 저지해야 될 의무와 책임이 있지 않소."
"하지만 애석하게도 저는 멀리 전선을 떠나 지금 사문을 받고 있는 몸,
더구나 사문위원 여러분들의 심기를 해쳐 곧 목이 달아날 처지인데 어찌 그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질 수 있단 말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사문회는 즉각 취소하겠소, 양 장군. 국방위원장으로서, 즉 귀관의
상급자로서의 명령이오. 곧장 이젤론으로 돌아가 방위와 반격을 지휘하시오."
겉으로는 힘이 들어 있는 목소리로 들렸으나, 말꼬리의 떨림은 그의
마음속에 도사린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그로폰티는 서열상 양의
상관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양이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요새를 잃게
된다면 그의 입장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양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네그로폰티는 자기들이 화약고 곁에서 불장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깨닫기 시작했다. 국가의 안전이 있고서의 권력이고, 상대방의
복종이 있고서의 지배이지, 우주법칙에 따른 확고한 힘이 그들에게 주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