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자신은 특별히 마음을 터놓고 사귈 만한 친구도 없었고, 믿고 따르는 선후배도 없었다. 그저 함께 술 마시고 뒷골목을 어울려 다니는 무리들만 있을 뿐이었다.
손풍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낙 사숙께선 장문인을 좋아하시죠?"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에 하얀 웃음이 떠올랐다.

"물론이지."

"왜 그렇게 장문인을 좋아하세요? 장문인이 무섭지 않으십니까?"

낙일방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자네는 장문인이 무서운가?"

"뭐 장문인이 겉모습보다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부담스럽더군요."

"지금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예전의 장문인은 정말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었어. 넉살도 좋았고, 항상 잘 웃었지."

손풍은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낙일방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두 눈에는 아련한 빛을 감돌고 있었다.

"그래, 그때의 장문인은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따로 없었어.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나보살(懶菩薩)이라고 불렀을까?"

"정말 장문인의 별호가 나보살이었습니까?"

"그렇다니까. 그때의 장문인은 마음씨 좋은 큰형 같았지. 항상 믿음직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감싸 줄 것 같은 사람...... 반면에 나는 성질 급한 사고뭉치였지. 마치 지금의 자네처럼 말야."

낙일방의 하얀 이가 싱긋 드러나는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손풍은 어색하게 웃었다.

"제가 그렇게 사고뭉치입니까?"

"하하......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설마 자신의 그런 모습이 개성 있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손풍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낙일방은 눈을 조금 크게 뜨더니 이내 나직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마치 예전의 나를 보는 것 같군. 나도 남자라면 잘못된 일을 참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을 보고도 참는다면 그건 남자로서 살아 있었도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말이야."

손풍은 참지 못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진짜 사나이 아닙니까?"

낙일방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그런 줄만 알았지.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네."

"그럼 진짜 사나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진정한 남자란 참을  때 참을 줄 알아야 하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아무리 어렵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고 견디어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루어 내고야 마는 거야. 난 많은 실수와 후회 뒤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

"......!"

"그걸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장문인이야. 장문인이야말로 참고 또 참았지. 왜 그렇게 바보같이 당하고만 있느냐고 남들이 물어도 그냥 웃기만 했어. 나는 그때 장문인의 심정을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지. 장문인이야말로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 가장 남자다운 사람이야. 그런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손풍은 비록 낙일방의 말뜻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가슴 한구석에서는 무언가 미묘한 감정이 꿈틀거렸다.
그는 솔직히 얼굴에 칼자국이 있고 늘 냉정한 모습을 보이는 장문인이 항상 남에게 당하고 참기만 했다는 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두려워하는 장문인에게 그런 시절이 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장문인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낙일방의 말 또한 선뜻 공감할 수 없었다.
하나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 군림천하 17권 낙일방과 손풍의 대화 중 -

 

Posted by 크라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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