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원하는 대로 해라"
무협소설이라 해서 순전히 칼부림만 난무하는 건 아니다..
칼부림과 경천동지할 무공은 물론 기본사항이지만, 그 것을 기본으로 하되, 전개되는 이야기의 큰 흐름은 주인공으로 부터 이어지는 인간관계와 그 속의 갈등, 사랑, 우정, 미움, 증오, 신뢰, 감동 같은 심리 및 사람의 희노애락같은 감정의 산물들.. 그리고, 주인공과 관련된 여러 등장인물들로부터 시작된 사건사고들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 중에 파생되는 또 다른 사건들처럼 소위 재밌는 이야기 책에서 나올만한 소설의 요소들은 기본적으로 다 들어가 있다.
때문에 무협이 아니라 무협소설인 것이며, 무협소설인 이상 화려함만 있는 게 아니라 처절함도 있는 것이고, 싸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각오도 함께 있으며, 결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위한 땀과 노력의 과정도 함께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무협소설이라고 어디가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마신이라는 무협소설.. 여기에는 그런 게 없다.
아니, 그 전에 이게 무협인지도 의심스럽다.
무협이라기 보단 어릴 때 봤었던 중국고전 촉산전의 레이저 빔을 쏘면서 하늘을 나는 장면묘사나 중국고전으로 알려진 서유기의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날아가 천계를 박살낸 다음 오행산에 깔리게 되는 식의 중국 판타지 같다.
그런데, 또 그렇게 '이건 중국 판타지야' 라고 단정짓기에는 자꾸 뭐가 거슬린다.
뭐가 거슬리냐 하면 무엇보다 주인공이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자꾸 거슬린다.
만약 주인공이 손오공이나 봉신연의의 태공망처럼 신술, 선술을 집중적으로 연마한 사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거슬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애초에 선술이 아닌 무공을 배운 무림인으로 나온다.
소년이 무공을 배워 마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마계에서 7백년동안 휘젖고 다닌 끝에 마신의 힘을 가지게 되었는데, 사람이 칠백년동안 살아있을 수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걸 가능하게 해준 것이 바로 어릴 때 배웠던 천뢰, 지룡, 인혼 이라는 삼재검법과 삼재보 였다는 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황당한 설정이라니... 삼재검법이 무슨 드래곤 볼이라도 되나?;;
마계에 떨어진 것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귀환병 이야기'의 이안은 진작에 신의 영역에 등극했겠다는 생각도 불연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 과연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하나..무협은 무협인데, 무협이 아니라니..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도대체 뭐라 표현해야 될 지 감이 안 온다.
판타지라 표현하기에는 정통 판타지가 화를 낼 판이고, 그렇다고 판타지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또 주인공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망상 속에나... 망상..
아, 그렇다.. 이건 망상이다..
무협은 무협인데, 망상 속에나 존재하는 무협.. 바로 망상무협인 것이다.
즉, 이 책은 이제까지 없었던(?) 망상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외에 다른 무슨 말이 필요할까?
설사 필요하다해도 어쩔 수 없다.. 난 이제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고..
그리고, 솔직히 망상무협에 진지함이란 어울리지 않는다.
괜히 진지하게 적어봤자 꼴만 우습게 될 뿐 아니라, 시간낭비에 뇌세포낭비니까, 이걸로 끝..
아..줄거리..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혈마자의 무림정복을 막기위해 천기자가 안배해 놓은 100명의 아이들.. 이 아이들이 마계에 빠져 하나둘 어이없이 죽어가고 최후까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마계를 초토화시켜 버리기까지 했던 마지막 1인, 단형우는 마계를 빠져나와 처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준 조설연과의 인연으로 조가장의 하남표국에서 쟁자수로 일하게 된다.
여기까진 뭐..별 문제없다.
그런데, 사람인 줄 알고 고용했던 단형우가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어떻냐 하면.. 사람을 죽일 때도 일반 무협소설처럼 칼로 슥삭하고 베어서 안 죽인다.
벼락을 떨궈서 죽이고, 째려봐서 죽이고, 손짓 한번으로 존재자체를 쓱 지워버린다.
몸에 지닌 기운은 누구도 뚫을 수 없고, 어떤 폭발과 화염에도 끄덕없으며, 아무리 은밀한 습격도 바로 감지할 수 있다.
또, 그 기운은 남에게 불어넣어 줄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도 일회성이지만, 그 효과는 100% 발휘된다..
그 어떤 위험상황에서도 목숨을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며, 송장되기 일보직전에 있던 사람이라도 단번에 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신통방통한 기운이다.
어디 그 뿐인가? 그 기운을 가진 사람이 어떤 위험에 빠졌을 경우 아무리 먼 곳에 있더라도 단번에 알아챌 수 있고,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한 걸음으로 공간을 접어 이동할 수 있으며, 필요할 땐 차원까지 베어 넘나들 수 있다.
불과 얼음, 선과 마와 같이 절대 한몸에 지닐 수 없는 양극의 기운을 동시에 몸에 지니고 있는 카오스적인 존재로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신보다 더 강하고 북유럽 신화의 오딘 신 보다 자유로우며 중국의 태상노군보다 더 신비로운.. 그야말로 신 중의 신, 신중신인 사람(?)이 바로 주인공 단형우의 실체인 것이다.
때문에 이 단형우라는 이름에 사람의 탈을 쓰신 신께선 모든 일에 거침이 없으시다.
워낙에 엄청난 신적능력을 보유하고 계시기 때문에 절대 기기묘묘한 술책이나 기발한 계획 따위에 놀아나지 않으신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단형우는 신이기 때문에 잡술 따위는 그냥 다 씹어먹고 들어간다.
마치 '능력없는 놈들이나 그렇게 잔꾀를 부리는 거다' 라고 주장하는 듯이 그냥 다 박살내 버린다.
인간의 잔꾀로는 도저히 신의 행보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툭하면 "니가 원하는 대로 해라" 고 말하며 거기에 걸리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담으시니, 이 앞에선 우내사존이고 십대고수고 뭐고 없다.
뭐..다행히 개념에 어긋나거나 하는 건 없어 그렇게 기분 나쁘게 봐지지는 않았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무협소설이지, 그리스 신화같은 신화관련 서사시나 성경책이 아니라고..' 라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올 정도라서...
이건 먼치킨이라서 재미있니 없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이전에 무협소설로써 가져야 할 기본상식이 안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런 거..
합일 이라는 스킬이 있는데, 이 스킬의 설정이 마신 내 모든 먼치킨의 제1 원흉이라 할 수 있다.
이게 어느 정도로 황당한 스킬이냐 하면 예를 들어 어떤 게임에 전사의 베기 스킬이 있고, 찌르기 스킬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스킬은 일반 평타보다는 위력이 강한, 왠만한 사냥에 두루 통용되고, 도움이 되는 액티브 스킬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 두가지 스킬을 합성한 결과 레벨 999의 최고 보스몹도 한방에 쓱삭 보낼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버그성 개사기 스킬로 재탄생하였다고 한다면 어떨까? 더불어 체력만땅, 마나만땅, 모든 스테이터스 수치 99찍어주기 까지 하면..?
그러니까, 합성하기 전에 스킬은 때릴 때 마다 20, 25, 23 이런 식으로 대미지가 나오던 스킬이었는데 합성한 이후엔 때릴 때 마다 9999.. 그것도 표시되는 한계가 9999까지 뿐이기 때문에 그렇지 실제로는 10000000 이라는 대미지를 노딜레이로 죽을 때까지 사용할 수 있는 택도없는 스킬과 캐릭터로 만들어줘 버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라는 거다.
바뀌기 전과 바뀐 후의 이 엄청난 차이가 상식적으로 이해 안가는 건 둘째치고, 황당함에 욕부터 터져나오지 않을까?
합일이라는 합성스킬이 바로 이런 막판 보스도 한방에 보낼 수 있는 신의 기술이지만, 정작 그 원형은 절대 평범한 인간이자 무림인이 사용하는 '무공'의 범주를 넘지 않는 것이었다는 게 이 버그성 개사기 스킬의 실체였던 것이다.
총 8권에 달하는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분량이지만, 이 대부분에서 워낙 황당함의 극치를 맛본 터라 마지막에 살짝 시도했던 의외성이랄까 나름 신선한 노림수로 분위기 전환을 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또 왠 장난..?' 이라는 별로 안좋은 느낌만 더 가중될 뿐이었다.
아무튼 지난 번에 퍼스트 맨을 보고 괜찮은 것 같아 찾아봤던 김강현 작가의 <마신>.. 정말 황당함의 극치였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으로 뇌신이란 것도 있던데, 그것도 한번 읽어봐야지.
만약 그 것도 요모양이면 난 아마 투명드래곤도 읽을 수 있을 것도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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